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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감 Jan 21. 2022

부조리

기상나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전투복으로 환복부터 한다. 모포를 먼저 개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옷부터 갈아입는 쪽이다. 암실같이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주섬주섬 양말을 신고 가랑이에 다리를 끼워 넣고 고무링을 발목에 건다. 보급품으로 준 얇은 고무링은 오래 끼고 있으면 불편해서 자대에 와서 굵은 일체형으로 바꿨다. 그리고 보급품은 버클을 끼우는 형식이라 고리에 양말이 자꾸 걸려 올이 나가기 십상이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상의를 입고 있으면 선임 중 한 명이 불을 확 켠다. 어둠에 최적화된 동공은 갑작스러운 빛의 출현에 당황하다 못해 고통스러워하고 그를 달래기 위해 나는 눈꺼풀을 굳게 닫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빛을 받아들인다. 관물대의 물티슈로 대충 눈곱을 떼어내고 아침 점호를 위해 생활관을 나선다. 신병이 아침 점호에 늦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점호 10분 전에 출발한다.


추운 겨울이면 보통 실내에서 점호를 진행하는데 그것은 매번 아침 방송으로 통제해준다. 오늘 아침 점호는 2층 다용도실이다, 이러면 다들 ‘그래 그래야지’ 하고 고개를 주억이며 비교적 느긋하게 준비하지만 연병장에서 점호를 실시한다 그러면 방상내피, 외피 거기다 스키 파카까지 입어야 하니 분주해진다. 물론 안 입어도 상관없지만 요즘 같은 날씨에는 뭐라도 하나 더 껴입어야 버틸 수 있으니 따로 시키지 않아도 챙겨 입고 나간다. 애초에 ‘요즘 같은 날씨’에 연병장으로 불러내는 것이 더 의아하긴 하다만. 당직사령님 말씀으로는 영하 5도 이하일 경우 실내에서 점호를 실시한다 하셨는데 밖을 나가보면 ‘이게 영하 5도가 안된다고?’ 싶을 때가 더러 있다. 나약한 건 나 자신이겠거니 하면서 부지런히 연병장으로 가 오와 열을 맞춰 선다.


애국가 제창, 복무 신조, 조국 기도문 낭독에 도수체조까지 하고 나면(순서대로 열거한 건 아니다) 아침 점호가 끝난다. 이후로는 순서에 맞게 아침 식사를 하러 가면 된다. 매일마다 아침, 점심, 저녁의 순서가 다른데 우리 신병들은 이 순서는 물론이고 그날 세 끼의 메뉴도 알아두는 편이 좋다. 오늘 아침 메뉴가 뭐냐는 선임병의 질문에 대답 못하면 막내가 그걸 몰라서 쓰냐고 한소리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만이 아니라 생활해보니깐 내가 궁금해서라도 메뉴를 외우게 된다. 다음날 아침이 먹을만하면 자기 전부터 기대감이 생긴다. 아침 메뉴 하나로 설렐 수 있는 소소한 행복한 존재하는 곳이 바로 군대이다.


아침 순번이 빠르다면 곧장 취사장으로 가거나 생활관에 잠시 대기하다 가기도 한다. 순번이 느리면 세면세족을 하고 나서 이동한다. 나의 경우는 그렇다. 보통 순번이 빠르던 느리던 밥을 먹고 와서 세면세족을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밥 먹기 전에 하게 되면 세면대가 부족할 걱정 없이 쓸 수 있다(선임들과 최대한 덜 마주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물론 순번이 빠른 날엔 나도 식사 후에 세수와 양치를 한다. 세수하고 온답시고 식사 집합에 늦어버리면 신병으로서 면목이 없다. 여기서 식사 집합이란, 식사 전에 미리 집합하여 인원수를 체크하는 행위이다. 후에 나올 일과 집합은 식사 집합과 비슷한데 한 가지 다른 점은 이때는 인원수 확인뿐만 아니라 행보관님이나 중대장님(혹은 소대장님)의 전달사항이나 지시사항이 있다. 안전사고에 주의하자 또는 내일은 토요일이니 힘내서 일과 마무리 잘하자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집합’에 우리 신병은 늦어선 안되므로 정해진 시간보다 10분 전에 미리 나가서 선임병들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만의 문화인진 모르겠지만 군 기강 확립을 위해서는 필요한 부분이라고 후임병인 나는 생각한다.


부조리라고 다 없애야 하는 건 아니다. 인격 모독이나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를 빼앗는 악질적인 부조리는 없애야 하는 것이 맞지만 일부 부조리들은 군기를 위해서 필요하다. 필요악인 셈이다. 신병들이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 하는 것이 기강 확립에 필수적인데 그걸 실현시키기엔 부조리가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란 것이다. 같이 근무를 섰던 선임병이 내게 해 준 말이다. 사실 이전까지는 부조리라는 단어만 들어도 치를 떨었는데 이날을 계기로 생각이 바뀌었다. 선임 자신도 막내일 때는 나처럼 부조리라면 무조건 없애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고 자신이 누군가의 선임이 됐을 때야 비로소 그 필요성이 보인다고 말했다. 우리 같이 실질적인 업무 중심의 부대는 긴장감 없이 업무에 나서면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본인을 위해, 그리고 같이 일하는 동료를 위해서 긴장을 늘 유지해야 한다. 위에서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부조리를 꼽은 것은 다른 방법도 물론 있겠지만 단시간에 효과적으로 긴장감을 불어넣을 수단으로 부조리만 한 게 없다는 의미다. 꼭 부조리가 아니더라도 시간을 들여 기강을 잡을 방안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아무튼, 집합 10분 전에 나서야 한다는 게 부조리라는 말을 하려고 이렇게 장황하게 쓴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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