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룡점정
눈이 번쩍 떠졌다.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확인하니 알람이 울리기까지 9분 남았다. 울리지 않은 알람을 끄고 곤히 잠들어있는 지우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잠에서 덜 깬 머리는 멍하고 무거웠다. 목을 뒤로 젖히기도, 양팔을 빙빙 돌리기도 하면서 뻐근한 몸을 깨웠다.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가 마주한 거실은 짙은 남색빛 어둠으로 가득했다.
지성은 세수를 하고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전날 고모가 차려준 반찬들이 빼곡했다. 반듯하게 나열된 반찬들을 본 지성의 감상은 처음은 당황, 다음은 고마움 그리고 걱정으로 이어졌다. 앞으로 사흘동안 셋이서 부지런히 먹어야 남기지 않을 양이었다. 이번 반찬공세에는 지성이 좋아하는 반찬이 특히 많았다. 오늘을 위해 일부러 고모가 신경 써준 것이다. 아침을 다 먹을 때쯤 구석부터 햇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갔다 올게."
신발에 발을 끼워 넣으며 지성은 등 뒤로 외쳤다. 아직 잠에 취해있는 지우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지성을 배웅하러 나왔다. 머리는 산발이고 눈은 보일 듯 말 듯 겨우 뜨고 있다. 눈을 비비며 지우는 지성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갔다 와." 지우의 음성에 이어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버지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느라 부엌에서 정신이 없었다. "잘 다녀와 아들! 아빠 오늘 일찍 올게."
알았어. 갔다 올게. 대답을 현관에 놔둔 채 문을 열고 나서려는데 부엌에서 아버지가 뛰쳐나왔다. 아버지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수 분처럼 느껴졌던 몇 초의 순간이 지나서야 입을 뗐다.
"아들! 하던 대로 편하게 해." 아버지는 하고픈 말이 더 있어 보였지만 이어가지 않았다. 뱉어낸 말들이 혹여나 부담이 될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그러한 마음을 헤아린 지성은 밝은 얼굴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응. 하던 대로 하고 올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선명하고 쨍한 푸른색으로 가득했다. 살짝 벌린 입 사이로 입김이 하얗게 피어오르더니 눈앞에서 흩어졌다. 지성은 마른 숨을 뱉어내고 서늘한 공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몸 구석구석 차가운 기운이 전달되는 게 느껴졌다. 11월에 들어서면서 지독하게 더웠던 여름이 그리울 만큼 사나운 추위가 이어졌지만, 다행히 오늘은 기온이 많이 올라왔다. 아버지는 반차를 내고서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그럴 필요 없다고 지성은 거절했다. 아버지의 말마따나 하던 대로, 평소처럼 등교하듯 가는 편이 평정심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당사자보다 더 긴장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운전을 맡기자니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부지런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옆을 스쳐가나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발소리의 주인은 지성의 등을 퍽 치고 멈춰 섰다. 입에서 악 소리가 삐져나올 정도의 충격이었다.
"전우여. 결전의 때가 왔도다. 준비는 됐는가?"
이른 아침부터 폭력적인 등장과 동시에 영문 모를 대사를 던지는 괴상한 인물은 단 하나밖에 없다.
"우리 전우님은 수능날 아침에도 기운이 넘치네 아주." 지성은 얼얼한 등을 만지며 이현에게 답했다.
"생즉필사 사즉필생.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니, 오늘 나는 죽기를 각오한 몸. 시련이여, 내게 오라. 내가 다 넘어서줄 테니." 손에 든 도시락통을 칼자루 마냥 높게 치켜들며 이현은 연극의 대사를 읊듯 외쳤다. 학교 전체를 통틀어서 지성과 같은 수험장이 걸린 학생은 지성을 포함해 단 둘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현이었다.
"그래서, 잠은 잘 잤냐?" 스위치를 달칵 키듯 본래의 말투로 돌아온 이현은 도시락통이 혹시나 새진 않았나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다.
"응. 늘 자던 시간에 잤어. 생각보다 잠에 금방 들었고. 넌 일찍 잤어?"
"나는 당연히 늘 자던 시간에 잤지. 수험생이라면 자고로 일관성 있게 패턴을 유지해야 하니 늘 그렇듯 2시 넘어서 잠들었지. 더 일찍 자면 오히려 피곤해." 이현은 바보 같이 킬킬 웃었다.
"일관성 있게 수험장 가서 졸지나 말고. 넌 수업 시작하기 전까지 기절해 있잖아."
"그럴지도 몰라……. 나도 내가 충분히 그럴 놈인 걸 알아서 방심할 수 없어. 죽기 살기로 깨어있을 수밖에. 생즉필사 사즉필생." 이현은 두 손을 이마 앞에 가지런히 모으고 기도하듯 생즉필사 사즉필생을 중얼거렸다.
졸업 후에 취업이 결정된 이현은 사실 수능을 응시하지 않아도 됐다. 실제로 이현과 같은 처지의 친구들은 여행을 가거나 운전면허학원을 다니거나 직종과 관련된 자격증 공부를 하는 등 수능과는 무관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학창생활의 화룡점정은 역시 수능이지." 이현의 이유는 단순 명확했다.
지성은 이현과 3학년 때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됐지만 1학년때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훤칠한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 때문에 아이돌 지망생이 학교에 있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물론 그것은 헛소문에 불과했지만 그만큼 그는 1학년때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하지만 다가서기 어렵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바보스러울 정도의 털털함과 시원시원한 성격 탓에 이현과 조금이라도 대화를 나눈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에 가고 싶다 생각한 적 없어?"
가을이 끝나갈 무렵 야자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때였다. 이현은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지금 마시면 언제 자려고 그러는 건지 지성은 속으로 생각했다.
"없을 리가. 엠티도 가보고 싶고 과팅도 해보고 싶고 넓고 큰 강의실에서 수업도 들어보고 싶긴 한데 그것보다 더 하고 싶은 일이 있어."
"하고 싶은 게 있다니 멋지네. 나는 아직 모르겠어 내가 뭘 하면 좋을지." 밤하늘의 달이 구름에 가려지자 거리는 살짝 어두워졌다.
"급할 거 있냐? 나야 빨리 돈을 벌고 싶으니깐 일을 배우는 거지. 너는 너만의 길이 있으니깐 걱정하지 마. 인생은, 방향만 잘 잡으면 된다 그랬어. 얼마나 빨리 가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누가 그러던데?"
이현은 지성을 바라보더니 씩 웃었다. "유튜브에서."
"그래도 수능이니깐 아무리 너라도 떨려?" 이현은 생긋 웃으며 지성에게 물었다. 자동차 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개를 휘저으며 날아갔다.
"당연하지.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야. 오늘 같은 날 떨지 않는다면 대단한 강심장이지."
"천하의 윤지성이 떨고 있는 장면을 내 두 눈으로 목격하다니." 세상 사람들, 여기 보세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 남자를. 이현은 손을 모아 입에 대고 소리 지르는 흉내를 내며 지성의 눈앞을 알짱거렸다. 지성의 참을성을 시험하듯 이현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지성에게 엉덩이를 걷어 차이고 나서야 관뒀다. 학창 시절의 피날레라 할 수 있는 수능날, 같은 수험장에 친구가 함께 한다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안이 됐다.
"다 왔네."
시시콜콜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눈에 익은 장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험 장소를 확인하려고 전날 방문했을 때 봤던 풍경들이 눈앞에 이어지고 있던 것이다. 응원문구가 적힌 크고 긴 플래카드들이 담장을 따라 주욱 붙어있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지성과 같은 수험생들은 물론 응원차 온 후배들과 선생님들까지 있어 정문은 사람으로 붐볐다.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같이 시험 칠 전우-이현의 말을 빌리자면-들을 마주치니 수능이 임박했다는 것이 실감 났다. 지성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목 뒤를 주무르며 정문을 지나는데 이현이 우뚝 멈춰 섰다.
"뭐 해, 안 오고."
이현은 가방과 도시락 통을 내려놓고 두 팔을 어깨 위로 쭉 뻗었다. 그리고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여기, 수능 만점자가 될 윤지성이 입장하신다!"
시험 시작까지 앞으로 한 시간 정도 남은 시점. 싸늘한 겨울 공기는 긴장감이 더해져 베일 듯이 날카롭다. 학생들은 온 신경을 집중한 탓에 평소보다 예민해져 있었고 지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동안의 학창생활이 모두 오늘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까지 미치자 상당한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여기 이 남자, 고요한 공기를 난폭하게 깨부수는 이현의 외침은 주변을 일순 정적으로 만들었다. 옆을 지나가던 여학생은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고 정문에 있던 사람들도 멈칫했다. 큰 소리에 놀란 길고양이는 황급히 자동차 밑으로 도망쳤다. 이현의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저 멀리 건물들 사이로 퍼졌고 그와 반대로 이쪽은 짧은 적막이 찾아왔다.
숨 막히는 고요함 사이로, 저 기운찬 사내가 말하는 '만점자가 될' 인물이 누군지 확인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지성을 향했다. 지성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새어 나오는 걸 느꼈다. 짧은 순간이 지나고 얼음이 녹듯 적막은 깨졌다. 고양이는 자동차 밑으로 고개를 쏙 내밀어 주위를 살피더니 다른 곳으로 황급히 움직였고 여학생은 떨어진 책을 주워 들어 손으로 툭툭 털어내더니 걸음을 재촉했다. 이현과 지성을 경계하는 눈빛을 보이면서. 이현은 번쩍 들고 있던 손을 내리고 바닥에 둔 가방과 도시락 통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굳은 채로 서있는 지성을 그대로 지나쳐갔다.
"뭐 해 안 가고."
이현은 뒤를 돌아 넋이 나가있는 지성에게 태연하게 말했다. "안 오면 먼저 간다."
지성과 눈이 마주치자 이현은 잘생긴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표정 보기 좋다 너. 나만 보는 게 아쉬울 정도야." 그러더니 교정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놈아 거기 안 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지성은 황급히 이현의 뒤를 따라 뛰었다. 두 사람은 운동장을 순식간에 가로질렀다.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작은 모래바람이 일었다.
헉헉대며 건물 입구까지 도착한 지성과 이현은 숨을 고르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닦아냈다. 이현은 도시락통이 잘 있나 확인했다. 그에게는 점심 도시락의 안부가 가장 중요한 듯했다.
"이게 웬 고생이냐 너 때문에 정말." 지성은 여전히 숨을 거칠게 고르고 있었다. 이렇게 숨이 벅찰 만큼 뛰었던 것이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때, 땀 좀 흘리고 나니깐 정신이 맑아지지?" 이현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투명하게 빛났다.
"잠은 확 달아났다 너 때문에." 지성은 무릎에 짚고 있던 손을 떼고 허리를 폈다. 준비 동작 없이 뛰어서 그런지 뼈마디가 지릿했다. 도대체 뭐가 뿌듯한지 알 수 없는 이현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기가 차서 화도 안 났다. 호흡이 점점 돌아오고, 겨울 공기의 서늘함에 땀은 금세 말라버렸다. 적당히 땀을 흘려서 그런지 딱딱하게 굳어있는 목도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한 번뿐인 오늘을 잊지 못할 순간으로 내가 만들어줬지?" 이현은 흡족해하는 얼굴이었다. 짜증은 나지만 조각 같은 얼굴을 보고 있으니 금방 누그러졌다.
"오늘 망치면 진짜 각오해라."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현에게 지성은 쏘아붙였다. 이현은 지성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손을 뻗어 지성의 어깨에 툭 올렸다. 손가락이 길고 곧은 손이다.
"넌 잘할 거야. 날 믿어. 그러니깐 하던 대로 편하게 해." 난데없는 응원의 말에 의아해하는 지성을 두고 이현은 휙 돌아섰다. "그럼 끝나고 보자."
이현은 훌훌 지성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아버지도 그렇고 이현까지, 오늘은 하던 대로 하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지성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던 대로, 하던 대로 주문처럼 읊었다. 스스로 최면을 걸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