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리터러시, 다양성, 그리고 시스템
2018년 12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스물한 번째 생일이 저물어갈 무렵, 평소 가깝게 지내던 최병천 선생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야? 생일 기념으로 맛있는 거 사줄게. 사무실 근처로 와!” 그리하여 이튿날 부모님을 잠시 찾아뵙고 서둘러 광화문으로 향했다.
최병천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그로부터 2년 전, ‘신촌대학교’에서 열린 <입법전문가되볼과>라는 강좌를 통해서였다. 법안은 어떤 식으로 발의되고 통과되는지, 정책을 매개로 어떻게 이슈파이팅을 하는지, 대안을 제시하는 정치는 어떻게 가능하지, 4주 동안 정말 넋 놓고 들었다. 오죽했으면 강의가 끝나고도 아쉬워서 술도 못 마시는 처지에 뒤풀이까지 꼬박꼬박 참석했을 정도.
그 인연으로 이듬해부터 최병천 선생님과 경제를 공부하는 스터디를 시작하게 되었다. 학생, 기자, 국회 보좌진 같은 다양한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국회 의원회관에 둘러앉아 책을 읽고 토론했다. 초기에는 전·현직 청와대 경제 참모들이 저술한 책들을 봤고, 이후 재벌, 경제성장, 산업정책 등을 차례로 공부했다. 나는 특히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을 수밖에 없었는데, 경제 분야가 생소했을 뿐더러 40세 미만만 발제를 한다는 희한한 규칙이 있어 자주 발제를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한 해가 지나며,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조금씩 달라졌다. 명확한 답이 존재하는지, 온전한 정의가 존재하는지 확신하지 못하게 되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모순적 존재이며, 우리가 이룬 사회는 고매한 이상보다는 적나라한 욕망에 따라 굴러갈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모든 가치와 욕망의 소용돌이 가운데 차선과 차악을 가려내며 전진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정책은 언제나 정치를 매개로 실현되기에, 좋은 정책 입안자라면 이 복잡다단한 과정을 훤히 꿰뚫고 있어야 한다.
그날 최병천 선생님과 저녁을 먹으면서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경제정책에 관한 이야기를 열심히 나누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교보문고에 들러 책 두 권을 선물로 사주셨다. 책등을 가볍게 쓰다듬은 뒤 가방에 고이 넣어두고 카페로 옮겨 대화를 이어갔다.
최병천 선생님은 왜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댔다. 우선 엄밀히 읽고 정확히 쓰는 법을 배우고 싶다. 프랑스는 대통령제 국가고 중앙집권이 강력하여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최근 마크롱이 시행하고 있는 일련의 개혁 조치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등등. 최병천 선생님은 유럽이 맞고 있는 숱한 위기들을 언급하며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이런 제안을 하셨다. “내가 국회에 있을 때는 이틀 이상 쉰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최근 직장을 옮겨서 좀 여유가 생겼거든. 혹시 내년 봄에 열흘 정도 미국여행 가지 않을래? 통역이나 번거로운 것들 좀 도와주면 비행기표는 내가 대줄게!” 와, 미국이라니.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당연히 같이 가겠노라 말씀드렸다.
그리하여 2019년 3월,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차를 타고 요세미티 국립공원 쪽으로 달렸다. 오랫동안 마케팅 분야에서 일하다 요셈투어라는 회사를 설립해 가이드를 하고 계신 아이크 신 대표님, 그리고 실리콘밸리에서 오랫동안 고군분투하신 엔지니어 한 분을 만나 맥주를 홀짝였다. 깡이 있어야 살아남는다. 잡초 인생도 언젠가 제도권으로 들어가야 한다. 탄탄대로를 밟지 않은 사람은 벼랑 끝 전술을 써야 한다. 남들이 넘볼 수 없는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 실리콘밸리에 미국에서 자라고 교육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외국에서 치고 들어온 사람들이다. 절박함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든 곳이다.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이 뛰어난 사람이다. 여러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귓가를 스쳤다.
며칠 밤을 보낸 뒤, 인앤아웃 버거로 허기를 채우며 팔로 알토로 향했다. 길 양옆으로 이름만 대도 알 수 있는 회사들의 로고가 하나둘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스쳐 지나는 건물들을 바라보며 ‘와, 여기가 진짜 실리콘밸리구나’ 생각했다. 이 동네는 괜찮은 주택 한 채에 150억은 기본이라고 했다.
이후 며칠 동안 구글, 페이스북, 에어비앤비, 아마존 등을 돌아보고 거기서 일하시는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휴랫과 패커드가 창업을 했던 차고도 가보고, 스티브 잡스의 집도 멀리서나마 구경했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역시 스탠퍼드 대학이었다. 캠퍼스만 여의도 4배 크기에, 로댕의 유명한 조각들이 곳곳에 누워 있었다. 날은 너무나도 화창했고, 학생들은 잔디밭에 누워 독서를 즐겼다. 캠퍼스는 깨끗하고 건물들은 단아하며 아름다웠다. 눈앞 풍경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곳이 바로 잡스가 어린 시절 물리학 강의를 청강했던 건물이란 말인가.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가 검색엔진을 구상했던 장소란 말인가. 우거진 나무로 뒤덮인 카페테리아에서 샌드위치를 주문해 손에 들고 있는데, 마음이 너무나도 흔들렸다. 진짜 미국으로 와야 하나? 이제껏 했던 수많은 고민, 생각, 토론들. 다 뒤로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아니야, 내가 미국 올 돈이 어디 있다고. 프랑스는 학비가 저렴하니 생활비만 마련하면 되지만, 미국은 1년에 수천만 원이 드는 걸. 게다가 나는 여태까지 불어 시험만 열심히 준비했는데. 미국 입시가 쉬운 것도 아니고 어떻게 단기간에 준비해서 온다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심란한 마음을 뒤로하고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로 떠났다. 북적이는 뷔페에 앉아 먹고 또 먹었다. 호텔에 놓인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을 바라보며 작가가 새로운 객체가 아닌 새로운 관념을 창조하는 현대미술에 대해 생각했다. 저녁에는 태양의 서커스의 오쇼를 보며 무대와 무용수들에 감탄했다. 그러나 2박3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한 필리핀 출신 이민자와 나눈 짤막한 대화였다.
그는 라스베가스에서의 삶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는데, 세금은 거의 내지 않고 혜택은 많이 받을 수 있어서라고 했다. 라스베가스가 속한 네바다 주의 주민들은 소득세(income tax)를 내지 않으며, 법인세(corporate tax), 영업세(franchise tax), 재고세(inventory tax) 등을 전혀 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공공부문은 어떻게 운영되나 물었더니, 세금의 대부분을 카지노에서 부담한다고 했다. 특히 라스베가스는 호텔 숙박비도 매우 저렴한 편인데, 이는 호텔의 주 수입원이 숙박이 아닌 카지노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이 늦게까지 도박을 하니 대부분의 상점이 24시간 문을 여는데, 미국에서 그런 곳은 거의 없다며 껄껄 웃었다. 카지노에서 내는 세금으로 도로도 닦고, 학교도 짓고, 공무원들 월급도 주고. 늦게까지 여는 술집에서 여가도 즐기고, 얼마나 좋냐며.
물론 도박으로 인생을 망치는 이들도 적지 않겠지만, 사람들이 적당히 욕망을 분출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고, 서비스 제공자들에게 확실한 이익을 보장해주되 그에 상응하는 세금도 확실히 걷는 미국식 합리주의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열흘의 여정은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나는 크게 세 가지로 생각을 정리했다.
첫째, 디지털 리터러시를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을 바꾸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 또 하나는 법을 개정하는 것. 그러나 이중에서도 사회를 앞장서 끌고나가는 것은 언제나 기술이다. 제도는 상황이 벌어지고 난 뒤 천천히, 보수적으로 변한다. 나는 언젠가 공공부문에서 일해보고 싶은데, 과학과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정책을 설계하면 치명적 결과를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다양성이 살아있는 곳에서 공부해야 한다. 혁신은 이종교배라는 말이 있다. 하늘 아래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지만, 이미 있는 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하면 언제나 혁신이 탄생한다.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이질적인 사람들과 끊임없이 부딪치면 고통스러울 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머리를 맞댈수록 더 커다란 불꽃이 튀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다.
셋째, 지적 자극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진 곳을 찾아야 한다. 교육자 개인도 물론 중요하지만, 제대로 설계된 시스템이 더욱 중요하다. 예컨대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문제를 정의하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다. 오늘 긴급한 회의가 있어 3시간 내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도착해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문제 해결에 집중한다면 기차가 빠를지, 비행기가 빠를지, 자동차가 빠를지 열심히 계산해서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문제 자체를 다르게 정의할 수도 있다. 이 회의는 꼭 필요한 것인가? 화상으로 대체할 수는 없는가?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면 안 되는가? 이렇게 본질에 접근한다면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 문제 해결에는 언제나 정답이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 정의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따라서 제대로 가르치고 평가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붙어 지난한 연구를 통해 정교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물론 완벽한 곳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 시스템을 가장 잘 갖춘 곳을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