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서울까지, 자전거 귀국 여행기
"사장님(大家さん), 사모님(奥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두 분 다 건강하세요!"
"그래요. 조심히 운전해서 가고, 언제 기회가 되면 또 와요."
"네! 알겠습니다!"
집주인 분께 작별인사를 건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은 5년 전 처음 이사 왔을 때처럼 텅 빈 상태. 고요하고 적적한 느낌이 방 안을 감돈다. 그동안 이 집에서 지내면서 살림살이가 한가득 쌓였었다. 하지만 귀국을 준비하면서 냉장고며 전자레인지, 책장과 책 등을 전부 처분했다. 먼저 한국에 보낼 물건들은 종이박스에 담아 전부 배편으로 부쳤다. 그다음 판매할만한 상태의 물건은 한인 카페 사이트에 올려서 팔고, 기부할 물품은 주위 친구, 후배들에게 선뜻 건네주었다. 나머지는 모조리 버렸다. 귀국하기 2주 전부터 조금씩 치우다 보니 마지막 날에는 침구류를 제외하고는 전부 정리가 끝나 있었다. 마지막으로 침구류를 종량제 봉투에 욱여넣는다. ‘이제 이 봉투를 마지막으로 집안 정리는 끝이다.‘ 하나둘 물건을 비우는 동시에 내 마음속에서도 일본 생활을 조금씩 정리해 나갔다.
9년 하고 3개월. 일본에서 지낸 시간이다. 군대 제대 후 처음으로 간 외국이자 첫 대학 생활, 그리고 첫 직장까지 전부 일본에서 보냈다. 20대 내 모든 즐거움과 괴로운 기억 등 온갖 희로애락이 깃든 장소. 수많은 추억을 쌓은 이곳을 이제는 떠나려 한다. 다만 자전거를 타고 도쿄에서 서울까지 향하는, 조금은 특별한 방식으로 갈 예정이다. 귀국을 결심하기 1~2년 전부터 인터넷에서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봐 왔다. 자전거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동안 화이트보드에 매일 주행 거리를 쓰고 인증하는 모습이었는데, 참 낭만적이고 멋져 보였더랬다. ‘여행을 저런 방식으로도 기억하는구나.’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아.’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일본에서 보낸 시간을 정리하는 동시에 잊지 않기 위해, 부모님이 계신 서울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 보자며. 그리고 4월 9일. 드디어 출발하는 날이 밝았다.
전날 마신 술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래도 몸 상태를 회복한 다음 출발해야 할 듯싶다. 잠시 쉴 겸 거실에 대자로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문득 주위 사람들에게 건넨 말이 생각난다. '그렇게 간다 간다 말하고 다녔는데, 정말 가는구나. 아직도 실감이 안 나네.‘ 자전거 바퀴 바람도 빵빵하게 채우고, 패니어 안에도 여벌의 옷이며, 가는 동안 읽을 책, 선물 받은 향수 등 가득 실어 놓는 등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제 몸만 떠나면 그만이다. 그런데 막상 귀국이 코앞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머뭇머뭇거렸다. 마치 귀국이라기보다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할까. 도쿄에서 출발해 오사카, 후쿠오카까지 갔다가 다시 도쿄로 돌아오는, 그리고 다음날 다시 회사로 출근할 것만 같았다. 그래 10년 가까이 도쿄에서 지냈으니 그런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 수 있겠다. 지금까지 내 생활 터전은 도쿄였으니까 말이다.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지낸다는 상상을 하기가 여간 어려웠나 보다. 아무래도 일본에 너무 오래 살았는지 싶다.
딩동-! 하며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현관문을 열어젖히자 반 보쯤 떨어진 곳에서 상현이가 서 있다. 상현이 또한 어제 밤늦게까지 함께 술을 마셔서인지 얼굴이 퉁퉁 부은 상태였다. 주말이면 좀 쉬지, 피곤할 텐데도 점심도 먹을 겸 나를 배웅해주러 집까지 와 준 것이다.
“숙취 괜찮아? 어제 집에 잘 들어갔어?!”
“어 나 햄버거 하나 먹고 집에 가서 바로 잤지. 야 점심 먹으러 가자. 주위에 뭐 먹을 데 좀 있냐?!”
“역 근처에 중국집(中華屋) 있는데 거기 가자. 난 계란 볶음밥(チャーハン) 먹으면서 속 좀 풀어야겠어.”
우리는 집을 나와 역 근처 중국집(中華屋)으로 향했다. 가게까지 가면서 어제 술 취한 이야기, 짐은 다 정리했는지, 가는 길에 숙소도 예약했는지, 도로에 자동차 많이 다닐 테니 길 조심하라는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가게 안에서도 런치 세트 메뉴를 고른 후 이야기를 이어갔다. 종종 대화가 끊기면서 침묵이 자리할 때도 있었지만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인지 어색하지 않다. 상현이랑은 대학교 오리엔테이션 때 처음 만나 벌써 8년째 친구로 지내왔다. 서로 다른 학부였지만, 동갑인 데다 유학생 수가 적기 때문인지 금세 친해졌다. 도쿄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는 같이 산도 오르고, 여행도 다니는 등 매주 만나면서 사이가 더욱 돈독해졌다.
하지만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존재하는 법. 회사 생활 2~3년이 지나서부터 나는 조금씩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을 갖기 시작했고, 상현이는 아직 일본에서 이루고 싶은 일들이 남아 좀 더 오래 있길 희망했다. 어느 쪽이 옳다고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니까 말이다. 그저 헤어질 때가 다가왔다고 생각할 뿐이다.
어제 자정까지 술을 마셨기 때문일까. 요리가 나온 후에는 둘 다 말없이 식사만 했다. 말을 나누는 횟수가 줄어들어갔음에도 상현이의 마음이 충분히 느껴졌다. 귀국 전에 마지막 배웅을 와 준 것이다. 행동으로 이미 표현했으니 굳이 많은 말이 필요할까.
밥은 먹은 후 천천히 작별인사를 나눴다. 이번에는 내가 전철까지 상현이를 배웅했다.
운전 조심하며 가
응 고맙다 너도 집에 가서 푹 쉬고
포옹도 악수도 안 나눴다. 평소 술 한 잔 하고 헤어질 때처럼 짧게 이야기 나누며 우리는 헤어졌다. 상현이를 배웅한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와 나갈 채비를 갖췄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다. 짐이라고는 노란색 패니어 가방 2개가 전부. 밖으로 나오면서 현관문을 잠그고 그대로 열쇠를 꽂아 놓은 채 도로 쪽으로 나왔다. 출발 전에 다시금 현관문을 바라보며 나 혼자 인사를 건넨다. ‘5년 동안 신세 많이 졌어. 다음에 또 놀러 올게.’ 자전거에 패니어 가방을 얹고, 자물쇠를 풀어 어깨에 사선으로 걸쳤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자전거를 이끌면서 도로 한가운데 섰다.
익숙한 풍경, 익숙한 거리 이제 더는 볼 수 없겠지.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본다. 주택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다. 햇볕 또한 다사롭다. 여행 가기 딱 좋은 날씨. 자전거에 몸을 실은 후 서서히 페달을 밟는다.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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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9일부터 4월 23일까지의 자전거 귀국 여행기입니다. 재밌게 읽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