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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현 Jan 29. 2024

아물다에서 보내는 편지 5화

아물다를 방문한 손님들이 쓴 쪽지

 아물다에서는 카페 음료를 주문하면 음료와 함께 나오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한 입 거리 간식, 다른 하나는 반듯하게 접은 쪽지다. 쪽지를 펼치면 안에는 깨알같은 글씨로 나열하거나 무심하게 쓴 구절이 있는데 먼저 다녀간 손님이 다음 방문객을 위해 남기고 간 것이다. 주로 책에서 감명 깊게 읽은 구절, 전하고 싶은 말, 혹은 나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적혀 있다. 쪽지를 받은 사람이 뒤이어 방문할 사람을 위해 글을 남기는 형식인데, 이는 새미가 매장을 오픈하기 전부터 줄곧 실행하고 싶었던 소소한 행사이다.     


 2014년 여름 미국 플로리다주의 어느 스타벅스 매장에서 생긴 일이다. 드라이브 스루 코너를 방문한 378명의 고객이 뒷사람의 커피값을 대신 내줬다는 뉴스가 화제에 올랐다. 보도에 따르면 뒷사람 커피 사주기는 8월 21일 오전 7시, 아이스 커피를 주문한 어느 여성이 뒤 차량 고객의 캐러멜 마키아토 커피값을 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커피를 얻어 마신 차량 운전자는 점원에게 다음 사람의 주문을 계산하겠다고 말했다. 선한 행렬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상황을 지켜본 점원은 참가한 사람들의 수를 기록하면서 줄지어 선 차량에 이 소식을 알렸다고 한다. ‘뒷사람 커피 사주기’는 오후 6시 무렵, 379번째 손님에 의해 중단될 때까지 11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진풍경을 낳았다.     


 새미는 스타벅스의 사례처럼 아물다에서도 ‘사람의 온기’가 이어지기를 희망했다. 몸과 마음을 아물게 만드는 우리 공간이야말로 어울리는 행사라면서 적극적으로 나섰다. 릴레이 쪽지 행사는 오픈 때부터 진행했다. 다행히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호응했다. 종이와 손 글씨의 매력이 전해진 것일까? 한 사람이 10장 넘게 쓸 때도 있었다. 쪽지함에 노란색 쪽지가 가득할 때는 남 부럽지 않은 부자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돌아오는 쪽지의 수가 적어졌다. 의무 사항이 아니라는 말에 메모지와 펜을 찾지 않는 사람이 늘어갔다. 급기야 쪽지함이 바닥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고 보니 작년부터 쪽지를 받은 사람들의 반응이 예전만큼 못한 것 같았다. 쪽지를 건네도 ‘아, 이런 게 있구나’ 하는 반응에 그쳤다. 받는 이의 마음까지 가 닿지 않은 것이다.     

 

모르는 타인과의 연결고리를 이으려는 행위에 침범당했다는 인상을 받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안 좋은 경제 상황으로 사회 전체의 여유가 없어진 것일지도. 손님들이 가고 난 자리에 쪽지가 덩그러니 남은 모습을 보면서, 호의를 받는 것도 주는 것도 부담스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안으로, 남에게서 나에게로 관심이 향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개인주의는 강해지고 타인과의 연결고리는 옅어지는 것만 같았다. 쪽지를 통해 사회가 삭막해지고 여유가 없어진다고 느낀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지난주 금요일, 파란색 후드티에 흰색 벙거지를 눌러쓰고 위아래로 검은색 옷차림을 한 여성 둘이 매장을 방문했다. 앳된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많이 잡아야 대학생 정도로 보였다. 여행용 가방을 짊어진 둘은 창가 자리에 짐을 풀고 음료를 주문했다. 그러고는 서가 이곳저곳을 둘러보고는 각자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새미가 쟁반에 음료와 쪽지를 담아 자리로 향했다.     


 쪽지에 대한 설명을 들은 둘은 겸연쩍은 듯 ‘아’하는 짤막한 감탄사 하나를 터트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그 후 살짝 웃음 띤 얼굴을 보였다고 나중에 새미가 귀띔해 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떡인 후 평소처럼 글을 매만졌다.      


 둘은 예상보다 오래 머물렀다. 2박 3일의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간다고 말한 그들은, KTX를 타기 전 마지막 일정이었는지 우리 공간에서 한참을 보냈다. 책을 읽다가 건네받은 쪽지를 읽고 호로록 음료를 한 모금 마신다. 아무 말 없이 창가를 바라본다. 한동안 숨 가쁘게 달려왔으니, 이곳에서는 잠시 내려놓고 스스로에게 빠지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연주, 그라인더에 원두를 가는 소리, 빵빵하고 밖에서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상념에 잠기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이 매장에 온 지 2시간이 되어갈 무렵, 쪽지를 쓰고 싶다며 카운터로 왔다. 나는 메모지와 펜이 들어있는 상자를 들어 통째로 가져가도 된다고 전했다. 상자와 품에 안고 자리로 돌아간 둘은 메모지와 펜을 들어 열심히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10분 후, 고개를 들어 작업을 마친 그들은 곱게 접은 쪽지 6장을 손바닥 위로 펼쳐 보였다. 우리가 전한 2장의 쪽지가 6장으로 늘어난 순간이었다.      


 그들이 떠나고 난 자리를 행주와 알코올 소독제로 닦았다. 자리를 정리하면서 앞서 방문한 사람과 나중에 온 사람을 이어주었다는 사실에 뿌듯해졌다. 우리 공간을 통해, 쪽지를 계기로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길. 결국 우리는 모두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길. 그를 깨달으면 홀로 맞서야 하는 이 세상도 조금은 견딜만해지지 않을까. 가끔 흔들리더라도 굳건하게 서서 한 걸음씩 내딛을 수 있는 힘. ‘느슨한 연결’에는 그와 같은 힘이 있다고 감히 헤아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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