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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Nov 30. 2023

아이리시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나요?

정확히 10년 전 처음으로 남자친구와 그의 가족들을 만나러 아일랜드를 방문했던 어떤 여름날이었다. 어느 날 그는 멋진 풍경이 있는 곳으로 드라이브를 가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울퉁불퉁 산길을 지나 탁 트인 풍경의 들판에 도착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서도 양 떼들의 울음소리마저 운치 있게 들리던 그때쯤, 그 는 나에게 결혼을 하자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이미 결혼을 생각하며 만나고 있었기에 언제든 청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올라 살짝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아일랜드의 날씨가 그렇듯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차 속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들의 눈앞에 거짓말처럼 커다란 무지개가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우리들의 앞날을 축복하겠다는 신의 약속처럼 느껴졌고, 순간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에 결국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눈물을 닦고 마음을 추스른 뒤 우리는 왔던 길을 그대로 달려 산에서 내려온 뒤 그의 가족모임이 예정되어 있던 큰 누님 댁으로 향했다. 명절이면 일가친척들이 모였던 풍경에 익숙했던 터라 남편의 대가족이 한데 모인 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처음 만나는 사람들 그것도 아일랜드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내 모습은 영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인 줄 알 텐데도 남자친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나는 곁눈질로 계속 그의 행방을 찾아야만 했다. 


그때 집 안에서 정원으로 급하게 나가는 그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평소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그가 시가 담배 상자를 들고 나타나 정원으로 가서 형제들에게 담배를 권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형제들은 소리를 높여 탄성을 지르며 남자친구를 꼭 안아주고 축하를 전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가족만의 전통 같은 것으로 약혼을 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형제들에게 시가를 권한다고 했다. 한편 이 광경을 집안에서 지켜보던 가족들이 한 명씩 나에게 다가와 깊은 포옹을 해 주며 축하를 전했다.      


축제의 분위기가 집안 가득하게 될 때쯤 한 동서가 나를 주방으로 불렀다. 펍(pub)에서 일한 경험이 있던 그녀는 나에게 아이리쉬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처음 들어보는 커피라고 대답을 했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나에게 만드는 법을 찬찬히 설명하면서 커피를 만들어 주었다.      


먼저, 그녀는 아이리시 커피에 맞는 손잡이가 달린 유리컵을 꺼내 뜨거운 물로 찻잔을 데우고, 흑설탕을 티스푼에 가득 담아 두 숟가락을 넣었다. 그다음에 뜨겁게 끓인 블랙커피를 유리잔에 삼분의 이 정도 담은 뒤 찬장에서 제임슨 위스키를 꺼내 적당한 양을 넣었다. 그다음에 동서는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이미 만들어진 더블크림을 숟가락의 뒷면을 이용해 블랙커피 위에 흘려 넣듯 정갈하게 담았는데 크림의 모습이 마치 폭신한 구름처럼 보여 보기에도 예쁜 커피가 되었다.      


“조금씩 마셔요. 위스키가 들어 있는 커피는 처음이니 조금씩 천천히.” 나는 그녀의 말대로 조금씩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제일 먼저 부드러운 크림의 맛을 보고 그다음 달달한 블랙커피의 맛을 느낄 때쯤 마지막으로 위스키의 강렬한 향이 입안을 강타했다.      

출처: A couple Cooks

나는 일생 처음 맛보는 아이리시 커피의 진한 맛과 생전 처음 경험해 보는 감정에 다시 살짝 어지러워졌고, 조용히 가족들 사이를 나와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다. “위스키가 들어간 커피라니.” 오늘 처음 맛본 아이리시 커피가 꼭 나와 제임스의 만남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국제결혼을 결심한 오늘, 세상 처음으로 위스키와 커피의 새로운 조합인 아이리시 커피를 마신 것은 왠지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커피의 두 가지 맛의 낯선 조합처럼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은 두 낯선 문화와 두 개의 인생이 예상치 않게 만들어진 조합과도 같으니 말이다. 오늘 마신 커피 한 잔은 그런 우리의 미래를 향해 그런 새로운 조합도 조화를 이루면 꽤나 괜찮은 맛을 일구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축복의 말을 해 주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결혼 생활이 정말 아이리시 커피와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 나와 제임스는 가끔 진한 커피와 위스키처럼 각자의 향과 맛을 버리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리다가 어떨 때는 그 쓰디쓴 감정을 드러내며 서로를 할퀼 때가 있었다. 재미있게도 그럴 때마다 마치 달콤한 크림처럼 우리들의 아이가, 나와 제임스를 감싸 안으며 그 쓴 맛을 달콤함으로 중화시켜 주어 대개는 다툼 따위는 시작도 하지 못한 채 끝나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낯선 나라에서의 결혼생활이 늘 행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예상치 못하게 일어나는 일들에 당황하고, 긴 겨울 해 질 녘마다 찾아오는 그리움은 늘 향수병을 달고 살게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약혼을 했던 그날에 제임스의 가족들이 나에게 보여준 따뜻한 환대를 떠 올리며 위로와 위안을 받고 다시 또 힘을 내 보자는 결심을 해 왔던 것 같다. 그런 날들에 기대어 나는 지난 10년 간 삶에 대한 긍정을 잃지 않으며 낯설고도 새로운 삶을 관조하며 살아낼 수 있어서 참 다행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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