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미안하데이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명절을 제외하고도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시골 큰댁에 자주 갔었다. 큰댁은 본채와 아래채로 나뉘어 ㄴ자 모양으로 누워 있는 구조였다. 본채에는 주방 옆으로 세 개의 방이 나란히 있었고, 아래채에는 요즘으로 치면 다용도실처럼 커다란 소쿠리나 쌀가마니가 있는 작은 방이 있고 그 옆으로 소죽을 쑤는 아궁이가 있는 외양간이 있었다.
어느 날 큰댁에 도착했을 때 마당에 전에 없던 집 동물 몇 마리가 뒤뚱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은 사람 말고는 다 무서워했던 나는 큰댁에 막 도착하자마자 꽥꽥거리며 나에게 돌진하는 뒤뚱거리는 것들을 보자마자 ‘엄마야’ 소리를 지르며 부리나케 툇마루 위로 뛰어 올라갔다. 잠시 뒤 나는 기둥 옆에 앉아 안심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제일 큰 한 놈이 다가오더니 툇마루에 머리를 올려놓고 가만히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노란색 큰 부리에 까만색 눈을 가진 그 녀석이 툇마루로 날아올 것 같아 무섭기도 했지만, 순한 녀석인 것 같아서 나도 계속 그 거위를 쳐다보며 있었다.
나는 집안의 어른들께 인사를 드린 다음 송아지 구경을 하려고 외양간에 갔다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집 근처 풀밭에 있겠지 싶어 대문 밖으로 나가봐야지 하면서 몸을 돌렸다. 그때 무리를 지어 다니던 다른 거위들과 닭들은 없고, 아까 전에 툇마루에 얼굴을 올려놓았던 거위 한 마리만 수돗가 앞을 얼쩡거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때 웬일인지 자신감이 생긴 나는 큰할머니께 거위에게 먹을 것을 줘도 되는지 여쭤봤다. 큰할머니는 툇마루 위에 자루에서 곡식을 쪼~금 꺼내서 몇 알씩 바닥에 놓아주라고 하셨다. 나는 큰할머니 말씀대로 자루에서 곡식을 꺼내어 바닥에 몇 알씩 내려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위는 바닥에 떨어진 곡식을 주워 먹기 시작했다. 기다란 목을 바닥으로 내려놓고 약간 둥그렇고 넓은 주둥이를 써서 곡식을 잘도 주워 먹는 거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슬슬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할머니, 거위한테 물은 어떻게 줘요?” 하고 여쭤보니, “거위 물통은 즈그 집에 있지.” 하셨다. 그때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거위를 물통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나는 증조할머니의 지팡이로 땅을 '탁탁' 내리 치고, 동시에 ‘슈슈’ 소리를 내면서 거위 몰이를 시작했는데 뭐! 놀랍지도 않게 거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때부터 거위가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심심한 데 같이 놀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그 거위에게서 더 이상 뒷걸음질 치지 않고 오히려 그 거위 뒤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이 녀석은 잠시도 쉬지 않고, 뒷마당 장독대에 올라가고, 대나무 숲 속으로 들어가고, 돌담을 따라서 온 집안을 한 바퀴 돌아 대문 밖에도 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한참 뒤에 배가 고팠는지 나를 쳐다보는 거위를 보고, 툇마루 위에 있는 자루를 열어 먹이를 주려는데 그런 나를 발견한 큰할머니께서 “너무 많이 주지 마라, 배 터진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거다. “배가 어떻게 터져요, 할머니. 흐흐.” 하면서 나는 자루에서 크게 한 줌 쥐어 거위 앞에 내려놓았다.
그때 집안에서 “언니야, 텔레비전에서 '빨간 머리 앤' 재방송한다. 빨리 온나.”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텔레비전 앞으로 가서 이불을 덮고, 빨간 머리 앤을 보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부엌에서 밥 하는 냄새가 나고, 큰 방에 밥상이 차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윤아, 그만 일어나라. 대낮부터 무슨 잠을 그래 자노, 얼른 밥 묵자, 일나라.” 나는 하루 종일 거위를 따라다니느라 피곤해서였는지 만화영화를 보다 잠이 들어버렸고, 잠결에도 배가 고팠는지 음식 냄새를 맡자마자 눈이 떠졌던 모양이었다. “많이 묵어라. 가마솥에 푸욱 삶아서 맛이 있을끼다.” 큰할머니는 하얀 국물이 담긴 그릇을 내 앞에 내려 주셨다. 나는 그릇을 당겨 내 앞에 놓고 잘 익은 동치미 반찬과 함께 늦은 점심을 그 어떤 날보다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밥을 다 먹고 다시 거위에게 가 보려고 닭장에 가 보니 다른 녀석들은 다 있는데 그 녀석만 없었다. 그래서 대나무 밭에도 가보고 대문 밖에도 나가 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 큰 거위가 없어요. 안 보여요. 어디 있어요?”라고 물으니 큰할머니는 설거지를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디 있기는, 니 배속에 있지.”
“누가요? 거위가요? (엉엉...엉엉) 다른 애들도 많은데 하필 왜 그 거윈 데요.. 엉엉”
“내가 안 그랬나. 먹이를 적당히 주라꼬.”
“내가요? 내가 먹이를 너무 많이 줘서요? (허어억) 그럼 진짜로 배가 터진 거예요?”
“고만 울어라. 처마 밑에 누워 있더라. 니가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지가 명이 다 한기지. 지가.”
“으어엉.... 하앙.... 우짜노....우짜노....으허헝......할머니...도대체 명이 다 한기 뭔데요....으허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