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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ocent Jan 29. 2021

2장 직선 운동

변위, 속도, 가속도


이제 본격적으로 직선운동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재미있는 그림 같아서 곽백수 작가님의 만화의 한 부분을 따 왔습니다. 마귀 할멈이 백설공주에게 독사과를 먹이려고 하다가, 실수로 사과를 바닥에 떨어트렸습니다. 그런데 백설공주가 이걸 보고, 왜 모든 물체는 땅으로 떨어지는지, 과학적인 질문을 합니다. 이 사과는 직선 운동을 해서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이 운동은 직선 운동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자유 낙하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여러분, 세상은 변합니다. 너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원전 6세기 이후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들이 ‘변하는 세상’을 기술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이 바로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근원을 ‘불’로 파악하고자 했습니다. 불은 뭔가를 태워서 변화시키고, 그 자체도 어떤 고정된 모양을 갖지 않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연이 변화한다는 것, 그리고 그 변화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절이 되면, 이 운동을 다양한 개념들로 파악하고자 합니다. 세상의 변화를 어떤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서술어’로 쓸 수 있는 단어들을 열 가지 범주로 구분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들에 속성을 부여할 때, 이렇게 열 가지 패턴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 열 가지 범주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른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네 가지 범주가 해당된다고 합니다.



첫째는 실체에 대해서, 생성 또는 소멸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양에 대해서,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질 또는 성질이 변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장소에 대해서, 대상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가 변할 수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변화’라고 생각해 온 대부분의 것들은, 이 넷 중 하나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만물의 변화를 이해하려고 한 것도 그렇게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이 네 가지 운동의 개념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바로 ‘장소 변화’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역사적으로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자연을 기술하는 운동이 바로 점 입자의 장소 변화를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물리학에 와서는 이것이 바뀔 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해 봅시다.



그래서 아무튼 요약하면, 우리가 만물의 변화를 기술하기 위해 본질적으로 알아야 할 운동이란, 시간에 따른 입자의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꼭 기억하기를 바라는 것은 이런 겁니다.


첫째, ‘운동’이란 시간에 따른 입자의 위치를 나타낸다.

둘째, ‘운동’은 세상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셋째, 세상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시간에 따른 입자의 위치를 본다는 개념은,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며, 아주 오랜 시간의 철학적 및 과학적 숙고를 통해 정리된 것이다.


이렇게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저는 은근슬쩍 여기 있는 그림에서 문자의 위에 ‘화살표’를 써 놓았습니다. 이것은 입자의 위치가 벡터로 표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입자의 위치는 벡터로 기술이 되는데, 이 벡터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뭔가 어떤 기준점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원점’이라고 부릅니다. 벡터는 항상 시작점과 끝점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벡터는 항상 원점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자연 법칙은 ‘원점’의 존재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원점을 어떤 곳에든 놓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에 따라 각 벡터가 갖는 값들도 바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 머리 끝의 위치를 어떻게 수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원점을 내 머리 끝에 잡으면, 위치는 영이 됩니다. 그러나 원점을 내 발바닥에 잡으면, 위치는 175 cm가 됩니다. 원점을 지구 중심에 잡으면 몇천만 킬로미터가 될 것입니다. 즉, 운동을 나타내는 벡터, 그리고 그 벡터를 이루는 수들은 모두 원점의 선택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점의 선택에 의존하지 않는 어떤 물리량을 찾을 필요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상대적인 벡터 차이, 즉 ‘변위’라는 것입니다. 변위는 두 벡터 사이의 벡터차를 의미합니다. 이 변위는 원점의 선택에 의존하지 않는 물리량이 됩니다. 단지 우리가 보고자 하는 두 점에만 의존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듯이, 변위는 두 점 사이의 중간 경로에 의존하지 않는 벡터량이 됩니다.



따라서 원점의 선택에 의존하지 않는 물리량을 가지고 자연 법칙을 기술하는 것이 올바른 접근 방법이 될 것입니다. 변위는 원점의 선택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이제 여기에 대해 시간 평균을 살펴봄으로써, 그림과 같이 평균 속도라는 것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시간 평균이라는 것은 두 시간 사이에, 얼마나 위치 벡터가 변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의 그림에 나온 것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부산까지 오는데 네 시간이 걸렸다면, 여러분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왔든, 기차를 타고 왔든, 비행기를 타고 왔든, 택시를 타고 왔든, 아니면 중간에 광주나 대전을 들렸든, 이와는 상관없이 동일한 평균 속도를 가지게 됩니다.


이제 이렇게 평균 속도를 구하는 시간 간격을 좁혀봅시다. 화살표가 차츰 엑스 투로 접근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평균 속도가 아니라 순간 속도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순간 속도는 앞의 평균 속도에서 나타냈던 시간 간격, 즉 '델타 티'를, 점차 줄인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우리는 관행적으로, '델타 티'가 0으로 접근할 때, 이것을 dt로 표시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델타 엑스'도 dx로 표시하게 됩니다. 그러면 '델타 엑스 나누기 델타 티'를 '디엑스 디티'라고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느 순간에서의 속도, 즉 순간 속도이며, 이 순간 속도를 구하기 위해서는, x(t)라는 시간의 함수를 시간으로 ‘미분’하면 됩니다. 사실은 바로 이것이 ‘미분’이 정확히 의미하는 것, 즉 평균 속도에서 시간 간격을 영으로 보낼 때의 극한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습니다. 속도에 대해서 우리는 속도의 평균 변화율, 즉 평균 가속도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평균 가속도에서의 시간 간격을 영으로 보냄에 따라, 순간 가속도, 또는 우리가 단순히 가속도라고 부르는 양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즉, 속도는 위치 벡터의 미분이고, 가속도는 속도의 미분이 됩니다.


그래서 일차원의 경우, 우리가 벡터를 무시할 수 있다면, 아래와 같이 적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속도는 운동의 시간 미분이고, 가속도는 속도의 시간 미분입니다. 물론, 가속도는 운동의 시간에 대한 두 번 미분이기도 합니다. 보통, 우리가 미분을 나타낼 때에는 ‘프라임’을 붙입니다. 그런데 물리학에서는 시간이라는 변수가 좀 특별하기 때문에, 시간에 대한 미분을 나타내기 위해 관행적으로 ‘프라임’ 대신에 글자 위에 점을 찍어서 표현합니다. 이 점을 ‘돗’이라고 읽으면 됩니다. 따라서 속도 브이는 ‘돗 엑스’가 되고, 가속도 에이는 ‘돗 브이’ 또는 ‘더블 돗 엑스’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운동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운동 자체는 원점의 선택에 의존하는 양입니다. 원점의 선택에 의존하지 않는 변위, 또는 이것의 시간 미분이 자연의 법칙을 기술하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운동의 시간 미분, 즉 속도는 원점의 선택에는 의존하지 않지만, 원점의 ‘등속 운동’에는 의존하게 됩니다. 즉, 모든 속도는 원점의 운동 상태에 따라 일종의 ‘상대 속도’로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에, 우리는 속도 자체만으로 자연의 법칙을 쓰는 것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속도의 한 번 미분, 즉 가속도는 어떨까요? 물론 이 가속도라는 것도, 좌표계가 가속 운동을 하면, 즉 좀 더 어려운 말로 ‘비관성 좌표계’에서는, 좌표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값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호성의 문제는 실로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이 문제가 진정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까지 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튼 가속도를 고려한다면, ‘등속 운동’을 하는 좌표계의 선택에는 의존하지 않는 운동 법칙을 세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원래 운동을 구하고자 했지만, 운동을 구하기 위해서는 가속도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가속도를 알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것으로부터 운동을 어떻게 구하면 좋을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가속도를 시간으로 적분하면 속도가 되고, 속도를 시간으로 적분하면 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미분의 역은 적분이다’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부정적분을 하면 적분 상수가 하나씩 나온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따라서 가속도를 두 번 적분하면, 운동에 나타나는 적분 상수는 두 개가 나오게 됩니다. 이 두 적분 상수는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이른바 초기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게 됩니다. 어떤 순간의 위치와 속도를 의미합니다. 어떤 순간의 위치와 속도, 즉 두 개의 초기 조건을 주면, 우리는 가속도를 두 번 적분 함으로써, 모든 순간의 위치, 즉 모든 순간의 운동을 알아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입자가 여러 개가 있는 경우, 그리고 입자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 미분을 단순히 부정 적분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속도를 두 번 적분하면 운동이 나오고, 두 번 적분 하는 과정에서 각 입자당 상수가 두 개씩 나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각 입자당 충분한 초기 조건을 결정해주면, 우리는 이 적분을 통해서 앞으로 있을 모든 일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전 물리학’에서 말하는 결정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고전 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초기조건만 결정되면, 그리고 모든 운동 방정식을 풀 수 있는 강력한 컴퓨터만 있다면, 과거든 미래든 어떤 시점에 대해서든 자연의 모든 변화를 결정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정론’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은 바로 여기, ‘미분의 역은 적분이다’라는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지금까지는 상당히 개념적인 이야기였다면, 이제 아주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어 봅시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로 제대로 ‘풀린’ 운동 방정식 문제, ‘등가속도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등가속도 운동이란 가속도가 일정한 운동을 말합니다.



첫 번째 그래프를 보시면, 가속도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적분이란 이 그래프의 아래 면적을 나타냅니다. 가속도 그래프의 아래 면적은 시간에 비례하여 증가합니다. 따라서 속도-시간 그래프는 직선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t=0’인 위치에서 초기 속도가 ‘브이 제로’인 경우를 고려했기 때문에, 이 직선의 그래프의 y-절편이 원점보다 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밑의 면적을 한 번 더 구하면, 즉 속도-시간 그래프를 한 번 더 적분하면 어떻게 될까요? 속도-시간 그래프에서 직각 삼각형에 해당하는 부분의 넓이는 '1/2' 곱하기 't' 곱하기 'a t'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a t'라고 한 것은 시간 t에서의 속도가 '브이 제로' 더하기 'a t'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위치-시간 그래프는 '1/2' 곱하기 'a' 곱하기 't 제곱'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t의 제곱에 비례하는 그래프가 세 번째 그래프, 즉 변위-시간 또는 운동-시간 그래프가 되는 것입니다.


등가속도운동이 물리학의 역사에서 가지는 중요성은, 바로 이 등가속도운동에 대한 연구를 통해, 비로소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또는 ‘자연학’, 그리스어로 ‘피지카’, 영어로 ‘피직스’라고 불리는, 그 유명한 책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송진웅 교수님께서 번역한 쿠싱<<물리학의 역사와 철학>>이라는 책에서 재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여기에 적어놓은 것처럼, 무게 또는 가벼움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물체들이 있다면, 그 크기의 상대적 비율에 따라, 즉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동일한 공간을 빠르게 이동한다, 즉 속도가 빨라진다고 합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절에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수학이 발달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그의 철학적 논의를 수식으로 비슷하게 표현해보자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물체의 속도는 물체의 무게에 비례하고, 매질의 저항에 반비례합니다. 여러분은 이 관계식이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직관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매질의 저항이 크다면, 물체가 무거울수록 더 빨리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확한 비례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직관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글쎄요,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이 근대 과학에 비해 ‘비과학’이라고 또는 ‘비이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결코 그렇게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모든’ 영역에서 맞았던 건 아니라 하더라도요.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점은 이렇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저항이 없다면 속력은 무한대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매질이 없는 곳은 존재할 수 없다, 즉 진공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진공’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논쟁을 낳았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언젠가 보게 되겠지만, 뉴턴은 중력이 무한대의 속도로, 즉 원격 작용과 같이 전달된다고 생각했고, 데카르트는 그럴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치 ‘진공’처럼 보이는 빈 공간이 사실은 모종의 물질로 채워져 있고, 이 모종의 물질에 의해 천체의 회전이 매개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진공 요동’을 생각해보면,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가 좀 더 옳았던 부분이 있다고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한 근대 과학혁명을 가져왔던 통찰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복하는 데에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문자 그대로 믿어본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여기에 대해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했던 것이 바로 갈릴레이였습니다. 갈릴레이는 이러한 사고실험, 독일어로 Gedankenexperiment라는 것을 합니다.



갈릴레이는 두 개의 상자가 낙하하는 상황을 생각합니다. 상자 A가 상자 B보다 더 무겁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상자 A는 상자 B보다 먼저 낙하할 것입니다. 그러면 상자 A와 B를 합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겉보기에는 상자 A의 낙하 속도와 상자 B의 낙하 속도 사이의 적당한 중간 값을 가져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즉 상자 A의 낙하 속도보다 더 느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차근차근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상자 A와 B를 합침으로써, 총 무게가 더 무거워졌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상자 A와 B를 합친 것의 속도는 상자 A의 속도보다 더 빨라져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자 A와 상자 B를 합치면, 이 둘을 합친 것의 속도는 상자 A의 속도보다 커질까요, 아니면 느려질까요? 둘 다 모순을 일으킨다면, 즉 상자 A와 상자 B를 합친 것의 속도가 상자 A만의 속도와 다르지 않게 된다면, 그렇다면 결국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는 물체의 ‘무게’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갈릴레이의 위대한 점은, 바로 이러한 사변에서 멈추지 않고, 실제적인 실험을 통해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려고 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여기 있는 그림은, 왼쪽 부분에 검은 옷을 입고 앉아있는 갈릴레이가 빗면 위에서 공을 굴리면서 실험하고 있는 장면을 나타낸 것입니다. 많은 역사가들은 갈릴레이가 ‘실제로’ 이 실험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릴레이는 낙하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 공을 빗면에 굴리는 실험을 합니다. 공을 그냥 낙하시키지 않은 이유는, 실제 자유 낙하과정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이며, 당시의 기술로는 정확히 시간 간격을 측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낙하하는 속도를 늦추기 위해 빗면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그 당시에 조악하기는 했으나, 일정한 시간 간격을 나타내는 장치를 마련해서, 동일 시간마다 이동하는 거리를 측정합니다. 즉,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평균 속도 및 순간 속도에 해당하는 것을 실험적으로 측정한 것입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갈릴레이는 공이 이동하는 거리 y가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결과는 우리가 앞에서 미분 방정식을 풀어서, 즉 가속도를 두 번 적분해서 얻은 결과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갈릴레이가 ‘최초로’ 미분 방정식으로서의 운동 방정식을 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갈릴레이의 시대에는 아직 미적분학이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미분과 적분을 통해 운동 방정식을 풀었던 것은 뉴턴의 시대 이후입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앞에서와 같은 비례 관계가 어떠한 기하학적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까지 원뿔 곡선에 대한 많은 연구가 되어 있었는데, 앞에서와 같이 수평 거리의 제곱이 수직 거리에 비례하는 경우에는, 원뿔 곡선 중에서도 ‘포물선 궤도’에 해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갈릴레이는 자유낙하운동에 대한 분석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복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근대 과학혁명의 초석을 놓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그림과 같은 ‘피사의 사탑’ 실험을 갈릴레이가 실제로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 올라가서 두 개의 공을 떨어뜨렸다면, 두 개의 공은 바닥에 동시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사 동시에 떨어졌다고 해도, 즉각 반박 실험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무거운 공과 깃털을 떨어트리면, 둘이 동시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증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 있는 두 개의 사진을 보시면, 먼저 왼쪽 사진에서는 공기 중에서 깃털과 공이 다른 속도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른쪽 사진, 즉 진공에서 한 실험을 보면, 공과 깃털이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기의 저항’을 무시할 수 있는 상황에서만 갈릴레이가 옳았던 것입니다. 공기의 저항 및 매질의 저항이 존재하는 일상 생활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정성적으로 좀 더 자연스러운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과학의 발전을 반드시 ‘지혜롭고 선구적인 과학자’와 ‘몰상식하고 완고한 고집쟁이’의 대립이라는 전형적인 프레임으로 기술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합리적이고 옳았던 부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에 매몰되어서, 운동의 실체적 진실을 연구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갈릴레이는 이를 벗어나서 운동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했고, 결국 중요한 성과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낙하운동에 대한 논쟁은 근대 과학으로 가는 길에 있어서 중요한 이정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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