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간지러우면 어때요
제가 단기 알바를 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프로그램에 데이터를 입력하는 일이었지요. 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이게 단순하긴 해도 업무량이 어마어마하고 마감일도 정해져 있는 데다가 지루하기까지 해서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잠시나마 여의도로 출근하며 직장인 기분을 내긴 했습니다만, 전혀 즐겁지 않은 날들이었죠. 지옥철에 끼인 채 출근하고, 창문을 등진 작은 책상에서 숫자들과 씨름하다 퇴근하길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몇 주가 흘러 마감일이 코앞에 닥쳤습니다. 남은 데이터가 많아 거의 매일 야근을 했었고, 그날도 어김없이 저녁식사를 하러 다 함께 구내식당으로 내려가는 길이었어요. 한 동료분이 문득 입을 열었습니다.
"혹시 동지 언제인지 알아요?"
"동지요? 아뇨, 모르겠는데요."
모두 눈이 동그래져서 고개를 저었습니다. 24절기의 날짜를 어떻게 다 알겠어요. 심지어 절기를 표시하지 않은 달력도 있는걸요. 그분은 휴대폰을 뒤적이기 시작했습니다. 어쩐지 들뜬 기색으로, 맹렬하게 말입니다.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지신 걸까요? 저는 지금껏 동지를 챙기는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동지라고 해서 시루떡이나 팥죽을 먹은 적도 없고요. 특이한 분이구나 싶었습니다.
"동지는 왜요?"
그러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아 그게, 동지에 제일 밤이 길잖아요. 동지 지나면 이제 낮이 길어질 일만 남았으니까. 동지만 지나도 금방 봄이구나 싶고. 그래서 기다려지더라고요."
하마터면 입을 벌릴 뻔했습니다. 순정만화 여주인공이 할 법한 대사를 마흔을 훨씬 넘은 아저씨가 했으니까요. '눈이 녹으면 봄이 된다' 이후로 이런 충격은 처음이었습니다. 갑자기 주위에 벚꽃이 흩날리는 기분이었어요. 저녁 메뉴가 마음에 든다며 앞장서 가던 그분에게서 후광이 보였던 건 저의 착각이었을까요?
저는 별로 궁금한 게 없어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웬만한 건 '그런가 보다' 하고 넘깁니다. 기대감 없이 살다 보면 딱히 놀랄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얼마나 놀라운 게 많은가요. 어떻게 매일 해가 뜨고 어둠이 깔리는 걸까요? 눈과 바람과 구름과 비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어째서 별과 달은 우리를 향해 떨어지지 않는 걸까요? 전구에 불이 들어오고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건 또 어떻고요. 내가 열 달 동안 엄마 뱃속에 있었다는 건 여전히 믿기 어렵습니다. 내 몸이 어떻게 이렇게 원하는 대로 잘 움직이는 건지. 마술의 비밀을 다 알게 된 후에도 얼떨떨하고 신기한 건 여전합니다. '대박, 저 생각을 어떻게 했지?' 하면서요.
아름답다고, 경이롭다고 솔직히 말해도 될 텐데 어쩐지 쑥스러워서 입을 다물게 됩니다. 그나저나 다음 주가 동지인 거 알고 계셨나요. 우리는 어두운 겨울밤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봄에 조금씩 가까워지겠지요. 내년 봄에도 코로나19가 우리를 주눅 들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돌아올 계절을 감사한 마음으로 즐겨야지 다짐합니다. 추위를 이겨내고 터져 나오는 꽃망울을 보며 신기하다고, 자연은 역시 위대하다고 말해보아도 좋겠네요.
다시 봄을 만나게 된다면 어여삐 여겨 주세요.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