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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Aug 05. 2021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죽음을 기억하는 삶

 평소 죽음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지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별로'. 삶이란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해서 어째서인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리게 된다. 탄생과 죽음, 그 간극이 어느 정도냐의 차이일 뿐 우리는 결국 죽는다. 하지만 '사느라 정신없는' 시간에 의식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는데, 나의 경우를 예로 들면 벚꽃이라든가 낙엽이 잔뜩 떨어져 버린 광경을 보았을 때. 또 한 계절의 죽음이로군. 그렇게 생각하며 불현듯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병원 원무과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한 중년 남자가 병원을 찾았다. 신환(처음 온 환자)이었다. 인적사항을 입력하던 중 가족관계를 등록하라며 한 여자의 정보가 모니터에 나타났다. 나이로 봐서는 아내로 생각되는 사람이었다.
 "OOO님은, 혹시 배우자이신가요?"
 남자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죽었시유."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사과와 함께 빛의 속도로 접수를 끝내고 남자를 진료실에 들여보냈다. 영겁. 그리 오래 산 것도 아니지만 나는 이게 바로 영겁이라고 부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센스 없는 병원 프로그램 같으니. 당사자를 조회하기 전에는 그 사람이 죽었는지, 이민을 갔는지, 분가를 했는지, 기초수급자가 되었는지 하는 것들은 당최 알 수가 없다. 뭔가 내 잘못인 듯 잘못 아닌 잘못 같은, 그런 찜찜한 일이었다. 아까 그 여자의 이름을 다시 찾아봤다. 67년생.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병원에 왔었다고 되어 있었다. 계절이 몇 번 바뀌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제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죽음은 할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아버지가 워낙 늦둥이라 할아버지는 내 친구들의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내가 중학생 때, 할아버지는 이미 팔순이 넘어 노환으로 거의 움직이지 않으셨고 알츠하이머까지 점점 진행되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엄마를 부르며 무섭다고, 아프다고, 죽기 싫다고 흐느끼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밤이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중에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셨고 삼 남매 중 나 혼자만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남동생은 너무 어렸고 언니는 고등학생이었으니까 어중간하고 한가한 내가 대표로 가게 된 것이리라. 고모들의 울음바다를 비집고 언뜻 본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냥 잠들어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사람이 죽으면 핏기가 가신다고 하는 게 바로 저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변은 너무나 소란한데 딱 죽은 이를 둘러싼 공기만 정지된 것 같아서 죽음이 이토록 기괴하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생각해보면 머리 아픈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인간은 어째서 이렇게 아등바등 발버둥 치며 죽음으로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느냔 말이다. 아니 애초에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태어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죽음 후에 뭔가가 있기는 한 걸까. 정말로 신이라는 게 있어서 우리에게 목적하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일까. 신의 존재는 믿긴 하지만, 내게 신이라 함은 누군가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아니다. 다만 '무언가' 있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만 하는 정도일 뿐. 이렇게 철학적이고 본질적인 문제가 던져질 때마다 나는 좀처럼 답을 내지를 못하고 머뭇거리고 만다. 하지만 분명 이 삶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확신한다.

 나는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나는 언제 죽는 걸까. 분명 두 문장의 뜻이 같은데 살지 못한다와 죽는다는 어쩐지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다. 어쨌든 살아있을 때는 최선을 다해 살았으면 좋겠고, 죽을 때는 미련이 없었으면 좋겠다. 병원에서의 그 사건은 뜻밖의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나는 버킷리스트를 수정했고, 벌여놓았다가 끝내지 못한 일들의 목록을 정리했다. 생의 감각이 돌아왔다. 분명 죽음에서 비롯된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톨스토이도 말하지 않았던가.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살면서 죽음을 기억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삶은 진지하고 즐거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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