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씨 Aug 04. 2022

이곳의 밤은 유난히 빠르다

[고성] 계획 따위 개나 줘라 4편

여름의 태양은 분명 집에 늦게 돌아가지만, 그게 언제까지고 바다에 머물러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만조시간을 한참 넘긴 것인지 물은 눈에 띄게 빠졌고 심지어 차가웠다. 여기서 더 놀다가는 입술이 파랗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그만 정리하기로 했다. 내 근처에 있던 가족들도 하나둘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저녁 먹으러 가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지도 앱을 열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 뭐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다기보다 내가 혼자 가도 좋을 곳이 없다는 뜻이다. 횟집 내지는 고깃집이라 일 인분 주문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나는 입이 짧아서 혼자서 일 인분도 채 다 먹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다. 마감은 또 어찌 이리도 빨리 하신단 말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달앱을 켜 봤는데, '텅'이라는 글자가 그렇게 슬퍼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운전을 할 수 있었다면 대충 씻고 시내로 나가면 되었겠지만 뚜벅이인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제길, 운전 못하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바닷물을 뚝뚝 흘리며 편의점에 갈 수는 없으니 일단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뜨뜻한 물에 씻고 나자 이대로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최소한 우유라도 있어야 숙소에서 제공하는 시리얼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겨우 다시 옷을 주워 입었다. 나는 두 번 다시 밖에 안 나올 사람처럼 양손 가득히 먹을 걸 샀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종류별로 세 캔이나 샀더니 기분이 괜히 좋았다.



다녀온 옷을 침대에 벗어던지고 캐리어에서 잠옷을 꺼내 입었다. 정리 따위 내 알바 아니다. 내일의 내가 치우겠지. 저녁을 먹으며 넷플릭스로 <기묘한 이야기>를 봤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밥 먹으면서 볼만한 장르는 아니지만,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이곳에는 나 혼자 뿐인데.


혼자가 아닐 때는 고려할 게 많다. 가장 가까운 가족만 해도 취향이 달라서 고작 TV 보는 것조차 쉽지 않다. 나는 범죄나 의학 드라마를 보면서도 밥을 먹을 수 있지만, 엄마는 '그런 거 보면서 먹으면 넘어가냐'라고 타박하곤 한다. 또 요즘 한창 인기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언니에게는 탐탁지 않나 보다. 가족도 이런데 타인들과의 관계는 어떻겠는가.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고, 그 복잡한 속을 티 내지 않으려 해서 더 탈이다. 다정도 병이라더니. 어쩌면 나는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시간. 그렇게 해도 누군가 마음 상할 일이 없어서 안심하고 삐뚤어져도 괜찮은 시간.


문득 숙소 구경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게 생각나서 몸을 일으켰다. 바다 뷰 말고도 마음에 쏙 드는 곳이었다. 현관 오른쪽에는 작은 방이 있었는데,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호스트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여행 관련 책이 많았다. 요즘 보기 힘든 CD플레이어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마침 <라라 랜드> OST CD가 있기에 틀었다. 밤에 듣기에는 조금 흥겨운 트랙이 많지만 내 마음이지 뭐. 주황빛 따뜻한 조명과 작게 틀어 놓은 음악에 금세 노곤해졌다. 하루가 끝나고 이런 곳에 돌아오면 기분이 어떨까.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행이 하고 싶었던 걸까 혼자 있고 싶었던 걸까. 지금 낯선 곳에서 보내는 휴식이 좋은 건가 홀로 독립된 공간에 있는 것이 좋은 건가. 혼자 살게 되면 나는 이 감정과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되는 걸까. 지금 생활도 나쁘지는 않은데 독립하면 더 좋아지는 걸까. 하지만 역시 결혼은 못할 것 같다. 자유가 주는 행복이 너무 커서 다른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는 걸 상상할 수 없다. 이런 나도 분명 언젠가는 외로워질 것이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타인을 견디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미워하지도 못해서.



'으이구, 나도 참. 지지리도 궁상이네.'

나지막한 소파에 쭈그리고 있으니 더 찌질해지는 것 같아 다시 침대가 있는 공간으로 향했다. 태블릿에 담아온 책을 읽으려고 누웠는데 알딸딸했다. 벌써 술이 오른 모양이었다. 아직 한 캔 남았는데! 눈이 슬슬 감겨오기에 시계를 보니 10시였다. 아니, 왜? 뭐했다고 벌써 10시지? 안돼. 이대로 가다가는 '눈 떴더니 아침'각이다.


무슨 오기인지 모르겠지만 비틀비틀 냉장고로 가서 남은 한 캔을 마저 꺼냈다. 써머스비였다. 베란다에 나가니 더운 기운이 훅 끼쳤다. 주변이 고요해서 멀리서 파도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책을 보며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어느새 절반이 사라졌고 시간은 이제 자정 무렵이었다. 시간이 너무 아까운데. 이대로 자기엔 책도 거의 못 읽었는데.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무겁다는 눈꺼풀을 무슨 수로 이기겠는가.


캔에서 마지막 한 방울을 털어마시며 내일 얼굴 많이 붓겠다고 생각했다. 좀 부으면 어떤가. 어차피 대역병 시대라 마스크를 쓸 텐데. 나는 대충 양치를 하고 침대로 몸을 던졌다. 섬유유연제 향이 좋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으려다가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일출! 내일 일출 봐야 해!'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7월의 바다는 차가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