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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Aug 18. 2022

동해안에 왔으면 해돋이를 봐야지

[고성] 계획 따위 개나 줘라 마지막 편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새해 해돋이도 잘하지 않는 사람이다. 1월 1일의 태양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는 늘 새로 떠오르고, 그렇게 따지자면 매일이 새로운 날인데 어째서 이 날의 해만 전 세계인의 추앙을 받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렇게 인생의 디폴트 값이 냉소에 가까운 나 같은 인간도 감정의 냉탕과 열탕을 오가곤 하는데, 고성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어지간히도 신이 난 모양이다. 이게 다 술 때문이다. 머리끝까지 취기가 오른 나는 결심했다. 동해안에 왔으니 내일 반드시 해돋이를 하겠다고.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휴대전화 알람이 울었다. 전날 제대로 자지 못하기도 했고, 차가운 바다에서 물놀이를 한 데다가 술까지 마셨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놀 때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되지 않는가. 집에 갈 때 버스에서 빈사상태가 되더라도 놀 수 있을 때는 놀아야 한다. 나머지는 몇 시간 뒤의 내가 잘 알아서 하지 않을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커튼을 열어젖혔다. 제발, 제발, 맑아라. 베란다에 나가보니 수평선 가까이에는 구름이 가득했고, 해는 구름 속에 갇혀 있었다. 조금 실망한 나는 혀를 찼다. 이번 생에 해가 수평선에서 뜨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아직 일출시간까지는 한참 멀었지만, 해변 산책을 하며 기다려 보기로 했다.



여름 바닷가는 새벽에도 눅진했다. 소금기 가득한 공기에 피부에 달라붙는 걸 느끼며 어제 물놀이를 했던 청간해변까지 걸었다. 오는 내내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내가 너무 일찍 나왔나 싶어 민망했다. 잠도 깰 겸 바닷물에 발을 한번 담가보았는데 0.5초 만에 후회했다. 너무 차가웠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나는 신발을 벗고 반대쪽 종아리에 젖은 발을 싹싹 문질렀다. 이렇게 혼자서 난리법석을 떠는 동안에도 해는 구름 속에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꽤 많았던 터라 어쩌면 이대로 날이 밝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냥 들어가자.'


나는 포기가 빠른 편이다. 이 정도 했으면 됐다고 생각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상의 노력을 했을 때 실패하는 걸 견딜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나는 스스로의 한계를 본 적이 거의 없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실패한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도, 내가 여전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머리로는 잘 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잘 부서지는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지만, 세상에서 제일 어렵고 복잡한 건 나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실망했을 때, 상처받았을 때,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나에게 여전히 큰 숙제이다. 나를 잘 달래고, 일으켜 세우고, 다시 미소 짓게 하는 법은 너무 어렵다. 그래서 뭐든 적당히,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로 사는가 보다 싶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털레털레 숙소로 돌아왔다. 체크아웃 시간까지 다시 눈을 붙일까 생각하는데 이상하리만치 창문 쪽이 밝았다. 설마 하며 얼른 베란다로 달려갔다. 해가 나오고 있었다. 구름 속에서 갓 태어난 듯한 해는 눈부시게 강렬한 오렌지색이었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이 광경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와 태양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오묘한 기분이랄까.


입을 반쯤 벌리고 쳐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시 나가야 되는데!'

나는 필름 카메라를 챙기고, 우당탕거리며 다시 신발을 신었다. 신년 해돋이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시시하게 생각하는 건 결코 아니다. 일출은 매일 일어나지만, 볼 때마다 신기하다. 내가 자연과 우주의 신비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해는 천천히 구름을 뚫고 떠올랐고, 마침내 날이 완전히 밝았다. 어쩐지 위로를 받은 것 같았다. 딱히 마음 상한 일도 없는데 말이다. 계속 잘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가 차오른 것 같았다. 그제야 이해했다. 이 울컥하는 기분과 벅차오르는 마음을 느끼기 위해 사람들이 1월 1일의 해를 찾아 떠난다는 것을.



일찌감치 씻고 나온 나는 베란다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시간이 더 지나면 더워서 금세 들어가고 싶어질 테니 이 짧은 순간을 누려야겠다 싶었다. 황금빛 윤슬을 보며 시리얼을 먹었고,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문득 돌아가는 버스 티켓 시간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이곳에 오래 머물며 질척거릴 계획이었다. 체크아웃도 최대한 늦게 하고, 터미널 근방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저녁까지 시간을 때울 참이었다. 서울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갑자기 집에 가고 싶어졌다.


숙소를 정돈하고, 호스트가 요청한 대로 베란다 창문을 조금 열었다.

'아 좋다.'

떠나는 날인데 아쉽지 않아서 더 좋았다. 수평선에 드리운 구름은 여전히 묵직했지만 하늘은 맑았고, 옅은 바람에 바다 냄새가 실려 오는 것 같았다. 지금이 집에 가기 딱 좋은 타이밍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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