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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May 11. 2023

베르히만 아일랜드

가장 밑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자유

  잉마르 베르히만을 매우 좋아하고 존경한다. 그를 존경한다는 사실이 영화 '베르히만 아일랜드'에서처럼 어려운 일일 수 있지만(여러 사생활 문제 때문에) 그가 구축하고자 한 삶의 어떤 지점은 존경에 존경을 표한다.


  나는 그가 차라리 영화감독이기보다 철학가라고 말하고 싶다. 포뢰섬에서 그가 치열하게 고민한 인간에 대한 사실들은 냉정하지만 따뜻하고 무디지만 날카로워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는 인간을 차갑지도 따뜻하게도 보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의 사생활을 함께 들먹이며 평생을 날카롭고 냉정한 시선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그는 자신의 페르소나와 함께 따뜻한 인물을 항상 그렸다. 차가움의 한계를 알고 있다고 할까? 주로 그의 여성 캐릭터들은 이중적이지만 따뜻하다. 그는 꽤 여성의 속성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예술가들은 늘 여성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다.


  그의 영화를 처음 접한 건 플랫폼에서다. '겨울빛'이라는 흑백 영화 역시 포뢰섬에서 찍은 것 같다. 별다른 장소가 나오지도 않고 많은 인물이 나오지 않지만 나에게는 SF 못지않은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작품이었다. 죽고자 하는 인물과 말리지 못하는 가톨릭 신부. 내세에 대한 믿음을 배워 온 신부가 허무주의에 빠진 한 인간을 끝끝내 그 어떤 말로도 설득할 수 없고 그의 죽음에 동화될 때 이 영화는 완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의에 빠진 한 인간을 집착에 가까운 수준으로 따라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건 삶이 끝나지 않는다는 어떤 반증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옆에서 계속해서 재잘 된다는 것. 그리고 미사는 정해진 시간에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 우리가 이고 있는 머릿속에 존재론적 회의감과 이별의 슬픔 등 많은 히스토리와 비감이 담겨 있더라도 머리 위로 바람은 부는 법이다. 정신은 물리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고 생존하는 이상 우리는 아무리 슬퍼도 밥을 먹고 배설한다. 그것을 멈추고자 하는 깊은 슬픔이 지나간 후에도 마찬가지다.


  베르히만 늘 그런 식이다. 역설에 대해 그린다. '결혼의 풍경'은 제목부터 대단한 역설이 아닌가? 아슬아슬한 부부 사이 그들의 풍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결혼의 풍경이 아니다. 그런데도 아내는 고린도전서의 유명한 말씀까지 끌어와 이상적 사랑에 대해 꿈꾸듯 말한다.


고린도전서 13:4-8 KRV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그야말로 웃픈 현실이다. 사랑에 대한 지식과 사랑의 퀄리티는 비례하지 아니한다.


   베르히만은 밝은 사람이었을까, 어두운 사람이었을까? 그의 흑백영화만큼이나 어두운 내면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혹독한 겨울을 가진 스칸디나비아 사람들 특유의 우울감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예상해 본다. 하지만 그의 포뢰섬은 봄, 여름, 가을에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토록 어두웠을까?  어떤 책에서는 그의 외로웠던 유년시절이 어두움의 원천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두움 속에서 밝음을 발견한다. 밑바닥까지 치고 와야 올라오는 무언가가 있는 법이다. 또 역설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는 매우 낙천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분명하다.  이토록 우울한 이야기를 계속 쓰면서도 오래 살며 영화 만들길 멈추지 않았으니 말이다. 사랑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매우 낙천적이고 정력적인 사람이 틀림없다. 사실 굉장한 우울감은 굉장한 자유와 쾌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우울할 수 있다는 것도 정신적 에너지가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니까.


  나 역시 그의 우울한 영화를 보고 우울한 게 아니라 자유로움을 느낀다. 밑바닥까지 아주 깊숙이 치고 들어온 존재론적 회의감과 슬픔의 감정은 이상하지만 그걸 보는 순간 생이 아름답고 자유롭게 느껴진다. 그 질문이 나만의 질문이 아니었다고 느낄 때 비로소 치유되는 기분인 것이다.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에서 냉정한 아버지는 딸의 아픔까지 글로 쓰려하지만 그 아버지의 난잡하고 복합적인 정신적 상태를 깊이 파고들고 딸의 정서까지 파헤치고 나서야 잔인하지만 마음이 놓인다. 그게 진짜다. 멋지게 보이려 하지 않는 솔직한 감정에 대해 난잡하고 잔인하게 분설할 때 이상한 쾌감이 올라온다. 베르히만의 작품은 대게 그렇다. 그는 아마 이 쾌감을 위해 모든 우울함을 짊어지다가 한 번에 자유를 느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다작을 하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평화로운 일상에 대해 믿지 않는다.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실은 늘 치열하게 어둡고자 하는 마음속에 숨겨진 법이다. 그것에 대해 잔잔하지만 진솔하게 말하는데 어떻게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덤덤한 솔직함. 모든 매력의 원천이다. 그래서 베르히만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는 모든 인간을 대신해서 어둡고자 하는 마음을 잔인하게 파고들어 빛을 발견한 사람이다.


  여름이 깊어지면 다시 베르히만의 DVD를 꺼내야지. 한낮의 열감과 빛의 강도에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이야기가 모든 것의 균형을 맞추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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