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겨운 유익함
유익해야 쓸모 있는 것일까? 브런치에 있는 각종 글들의 제목을 보니 스타트업 차리는 법, 상처받지 않는 법, 이혼하는 방법, 디자인, 비즈니스... 등등 각종 법들이 난무한다. 나 역시 혼란한 세상 속에 규칙을 찾겠다며 법을 선택했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법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정보 위주의 글, 정답을 강요하는 글. 가끔은 그런 글들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많아도 너무 많다.
인터넷의 한계일까? 인터넷상의 글들을 목적의식이 매우 분명하다. 무엇을 팔거나, 사람을 끌어들이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글 자체를 음미하고 즐기는 사람들은 점점 적어지고 있다. 낭만이 없어지고 있다고 할까? 지나치게 과시적이고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만약 시인 이상이 현대 사회에 태어나면 어땠을까? 그는 카페를 차려 인스타그램 홍보를 하다가 하루를 다 보냈을 것이다. 다방에서 유유자적하며 글을 쓰고 누군가 그 어려운 글을 믿고 발간해 주고... 사람들이 두고두고 글을 회자하고... 뭐 이런 환상 같은 시대는 지나갔다. 글도 진화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진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한 때는 비문학 밖에 읽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래도 정치학, 법학을 전공하다 보니 논리적이고 분명한 을 보는데 익숙해져서 어딘가 모르게 문학을 읽으면 길을 헤맨다는 느낌이 들어 불편했다. 목적의식도 불분명하고 논리적이지도 않으니까. 그러다가 단어의 맛을 알게 된 적이 있었다. 시집을 통해서다. 심보선 시인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라는 시집을 읽고 혼란스러운 내 마음에 단어를 붙일 수 있다면 꼭 이 시집이겠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무라카미 하루키를 필두로 소설을 시작했다.
문학을 읽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처음에는 줄거리만 파악하는 글 읽기를 했다. 번역이 별로라고 해도 그게 왜 별로인지 느끼지 못했다. 정보만 잘 전달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연습량이 늘어나니 몇 출판사의 번역서들은 불편해지기 시작했고 한국 소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한 번의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국어 그대로의 맛을 느끼고 싶었다. 문장을 느끼고 감탄한 책도 많다. 어느 순간 글을 읽다 감정이 휘몰아쳐서 눈물이 났던 책도 있었다. 그렇게 문학의 맛을 서서히 알아간 거 같다.
여전히 문학을 읽는 연습 중이다. 여전히 직업상 비문학을 읽을 일이 많고 비문학이 주는 즐거움을 놓지 못하고 있지만 문학을 하고 싶고 잘 읽고 싶다. 살면서 미처 터득하지 못한 감정을 개발하고 다양한 표현 수단을 터득하는데 글 읽기, 쓰기보다 좋은 것이 있을까?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성장한다. 수많은 동화 속에서 기본적인 윤리 의식을 키우며 성장해 왔고 후에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정립하기도 한다. 어떤 글을 읽느냐, 어떤 이야기에 마음이 끌리냐가 곧 이 세상에서 나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알게 한다. 위치를 정하지 못하면 휩쓸리기 쉽다.
여전히 세상이 강요하는 파도 속에서 흥청망청 살고 있지만 내 본질은 결코 아주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삶에만 머무를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안다. 내가 읽은 이야기 속 인물들이 그랬고 그 인물들을 통해 나를 발견했다. 아마 그들처럼 계속해서 내적 갈등을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이야기를 읽고 이야기를 쓰면서 벗어날 수 없는 나라는 굴레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