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유행은 이미 좀 지났나요?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에 대한 북리뷰입니다. 마치 저를 제외한 모두가 이미 이 책을 읽어본 것 같더라고요. 저는 이제야 읽었고, 읽게 된 계기가 특별해서 북리뷰를 남기려 노트북을 켰습니다.
제가 최근에는 북리뷰 쓰는 걸 상당히 지양하고 있어요. 지난주에 올린 <책 읽고 삽시다> 프로젝트처럼 다른 사람과 함께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그 녹취록을 북리뷰처럼 쓰는 것은 제게도 남들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 혼자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해서 어떠한 평가를 내리거나 작품을 분석하는 행위는 오히려 저를 편협한 사고의 틀에 가둬놓는 것만 같아요. 책을 읽고 독서록을 쓰는 등의 행위가 나쁘다는 게 전혀 아니에요. 다만 최근 들어 저에게는 그 행위가 마다하고 싶은 대상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좀 중요해서, <아몬드>에 대해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간략히 제가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설명할게요. 저는 대체로 어떤 작품을 읽든 실존주의 철학적인 관점(구체적으로는 도스토옙스키적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인물에 대한 심리 분석을 중심으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해석해요. 예컨대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해리가 볼드모트의 호크룩스들 중 하나라는 설정도 실존주의에서는 칼 융이 했던 발언(“천국으로 가장 높이 솟는 나무는 그 뿌리를 지옥에 두어야 한다”)과 맞닿는 부분이 있어요. 저는 그런 것들 위주로 작품을 보게 돼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실존주의적인 방법으로만 살아갈 수 없어요. 사람들은 다 저마다의 철학과 가치관을 갖고 있고요. 그래서 제 방식과 제 관점대로만 책을 읽다 보면, 저의 실존주의적 가치관은 더욱 강화되는데, 그것이 점차 아집과 편협한 사고로 변질되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실존주의적 철학의 가장 기본 전제이고요. 그런데 제 주변 사람들은 행복을 목적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제가 제 가치관에만 매몰될수록, 그들과 대화하기 어려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읽을 때도, 제 해석은 마음속에만 놔두고, 다른 사람의 해석을 최대한 들어보려고 해요.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방법과 가치관을 수용해서 제가 언제든 여러 사람의 의견에 공감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두고 싶어요. 적어도 제게는, 혼자 북리뷰를 쓴다는 것은 그 문을 닫아놓는 행위입니다.
오늘 이 아몬드 같은 경우에는 제가 리뷰를 쓰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 이유는 제가 이 책을 대여받았기 때문이에요. 최근에 알게 된 인생 선배에게 받았어요. 함께 대화하는 동안 너무 재미있었던 그런 사람이에요.
저는 제 책을 빌려준 뒤 돌려받거나, 누가 제게 책을 빌려줄 때, 마치 서울시립미술관에 딱 입장할 때와 같은 기분이 들어요. 몹시 설레고, 책 앞에서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다듬어야 할 것만 같달까요? 빌려준 책도 나중에 돌려받으면 제가 줬을 때와 제가 받았을 때의 책이 조금 달라요. 조금 더 구겨져 있기도 하고, 책 모서리 같은 경우에는 조금 더 흠집이 나 있어요. 그런데 그때의 기분이 새 책을 샀을 때보다 더 좋아요. 나의 책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흔적이 남았다는 게 저는 정말 기분이 좋더라고요. 이번에는 제가 책을 빌려준 게 아니라, 누군가 저한테 책을 빌려준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열심히 읽고 글도 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동안 안 쓰던 북리뷰를 적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북리뷰 쓰기 참 쉽지 않은 책이었어요. 마치 김훈 작가의 <흑산>이라는 소설을 읽었을 때와 느낌이 상당히 비슷해요. 그 책을 읽을 때도 너무 좋은 책인데 어떻게 말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군대에서 그 책을 읽었고, 독서록을 10번 제출하면 휴가 1일을 받기 때문에, 어찌어찌 독서록을 적어서 냈는데, 담당 간부가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너 이 책 읽은 거 맞아?” 이러는데, 그 당시에도 서평을 자주 쓰던 저로서는 그 말에 자존심도 상하고, 난감했습니다. 여하간, 김훈의 <흑산>은 서평을 적기 너무 어려웠어요. 이 책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몇 글자 적는 걸로는 절대 이 책의 진정한 가치를 못 담아요. 안 읽어보신 분은 직접 책을 읽는 게, 이 서평보다 유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영화를 볼 때 노트 메모장에 중요한 것들을 받아 적어가면서 영화를 본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저도 책을 읽을 때는 대부분 그렇게 읽어요. 어디 적어놓는다기보다는 형광펜을 칠하거나 아니면 포스트잇 날개를 붙이는 방법으로요. 이 책은 그렇게 읽지는 못했어요. 형광펜은 당연히 제 책이 아니니 못 칠하지만, 무엇보다도 넋 놓고 읽느라 ‘아 이 부분은 중요한 부분이다’ 생각하면서 페이지를 적어놓거나 포스트잇을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이동진 평론가도, 정말 영화에 심취할 때에는 펜을 내려놓은 채 넋 놓고 영화를 보지 않을까요?
<아몬드>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 볼게요. 우선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은 들었어요. 손원평 작가가 이 글을 쓰면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많이 참조한 것 같아요. 그 책을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소설의 제목인 데미안은 주인공의 이름이 아니거든요. 주인공은 에밀 싱클레어라는 소년이고,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친구입니다. 그러나 소설의 주제는 싱클레어보다는 데미안이 가진 통찰과 그것으로 인해서 싱클레어가 어떻게 변하는지였기 때문에, 책의 제목은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데에 중추적 역할을 한 데미안이 된 것이죠.
저는 <아몬드>에서도 주인공인 선윤재라는 아이가 상당히 독특한 특징을 가졌지만, 곤이라는 윤재의 친구에 더 관심이 많이 갔어요.
제 눈에 윤재는 오히려 스스로 자신의 길을 너무 잘 개척한다고 느껴서 그저 대견하게만 보였고요. 반면에 곤이는 ‘이 친구를 어떻게 도와줘야 되는 걸까’, ‘어른들과 주변 친구들이 어떻게 곤이에게 다가가야 하는 걸까’라는 걱정과 궁금증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윤재의 변화보다도 곤이의 성장이 소설에 있어서 더 핵심처럼 느껴졌어요. <데미안>의 데미안처럼요.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볼 때면 어떤 감상을 느끼시나요? 아마 아무런 감성을 못 느끼실 겁니다. 아침은 학생은 등교를 하고, 직장인은 출근을 해야 하는 시간이니까요. 그래서 거울을 보면서 감상에 젖을 수 있는 시간은 없고요. 그런데 저녁에 잠들기 전 씻으면서 보는 얼굴은 좀 다르다고 생각해요. 최근 들어 제가 몇 번씩 거울 앞에 서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웃을 때 원래 이렇게 생겼나?”
“내 광대가 이렇게 튀어나왔었나”
“눈은 정말 어렸을 때랑 그대로인 것 같네...”
그런데 그런 제 얼굴을 볼 때마다, 뭔가 녹음된 자기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제 얼굴이 되게 낯설게 느껴져요.
가장 친숙해야 할 얼굴일 텐데 한 달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소원한 친구보다도 그 얼굴이 어색해요. 그리고 그런 감정은 단순히 얼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똑같이 느껴집니다.
“내가 원래 이런 일로 슬퍼했었나?”
“나 너무 속이 좁게 행동한 걸까”
“이럴 때 보면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것 같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인 윤재는 세상을 대하기를 어려워하고, 또 세상은 그런 윤재를 마찬가지로 어렵게 느껴요. 친구인 고니는 자신이 마음이 아프다고 터놓고 얘기하는 법을 모르고요. 그래서 세상은 그의 아픔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해요. 윤재가 세상을 어려워하듯, 고니가 자신의 감정을 어려워하듯, 저도 저 스스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는 순간이 많아요.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방법을 모르겠는 것 같아요. 윤재와 곤이는 어떻게든 그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독자인 우리는, 표면적인 상황은 윤재나 곤이와 달라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결국 똑같은 상황에 쳐해 있는 것으로 느끼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이 둘은 가장 빠른 길로, 가장 효율적인 길로 세상과 대화하는 방법을 찾아내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빠른 길을 찾는 것은, 이미 경험해보지 않은 장소에서는 아는 게 불가능하거든요. 삶에 던져지는 바위들은 어떻게 던져질지, 어떻게 피해 가야 효율적 일지 미리 예단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과의 대화 방법”도, 효율적이고 빠른 길을 찾기보다는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고 계속 접점을 찾아봐야 하는 것 같아요.
사실 얼마 전부터 저는 제 감정이 너무 어렵다고 느꼈고, 그래서 최근에는 하루에 30분에서 2시간 정도는 그냥 정말 저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는데, 휴대폰을 포함해 아무것도 없이 혼자 산책을 나가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요. 세상은 더 빠르고 효율적이게 됐으니까, 우리 자신은 그런 발 빠른 삶, 효율적인 삶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루에 그 정도 시간만큼은 좀 스스로를 대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짧게는 30분, 길게는 2시간.
손원평 작가의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을 읊으면서 리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나는 부딪혀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