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태균 Sep 04. 2020

새로운 비평을 위한 몇가지 서술

윤태균 (예술학)

1.
혹자가 비평의 위기를 말할 때 나는 비평의 해체를 제안한다.

2.
비평의 위기라는, 다소 긴박해 보이는 이 상황은 지난 수년간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이것은 비평만의 위기라기 보다는 비평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 조건의 위기이다. 이제는 너무나도 진부해진 이 위기라는 상황에는, 당연하게도 미술계 내부의 제도적인 측면, 미술 경험방식의 변화, 대중의 비평 수용 등의 오래된 논의들이 따라붙는다. 되풀이되는 이러한 논의들에서 비평가들은 비평의 독자성으로 그것을 정당화했다. 비평의 독자성이란 무엇인가. 논문, 저널리즘, 애호가의 에세이와 사변적 글쓰기처럼 다른 형식의 ‘글쓰기’와는 차별화되는, 차이로서 형성된 비평의 범주 형성은 비평을 특수한 조건 하에 두며, 가치라는 목적론의 환상에서 비평행위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을 자의적으로 설정하며 지속되었다.(예컨대 내가 2020년 기획한 전시의 얼개를 위해 여러 이론들의 인용으로 구성한 <디지털 나르코시스-미디어 묵시록>은 비평이 아닌 무언가일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도출되는 비평 존재의 규명은 대부분 ‘수행성’과 ‘독자성’이라는 목적론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2-1.
포스트모더니즘이 늦게나마 문화 전반을 휩쓸고 지나간 후 비평가의 특수한 지위는 탈각되는 가능성을 보이며 (비평의)대상과 결부된 여러 행위들이 비평의 영역으로 포섭되었다. 이것은 세계가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드러내는 폭로자를 자처하면서도, 생활세계와 철저히 분리되었던 비평이라는 영역이 자신을 소비해줄 사람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계의 신자유주의적 태도는 결국 비평을 비신성화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유튜브와 페이스북, 트위터로 대표되는 새로운 플랫폼들이 대중들에게 견해 표출의 장을 제공했다는 것도 이러한 흐름에 일조했다. 비평가는 이제 (적어도 대중에게는)학자보다는 수필가이고, 제사장보다는 복사(服事)이며, 첨병보다는 본대(本隊)이다.

3.
다시 비평 내부의 관계로 돌아왔을 때에, 비평이 대상이 스스로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언어로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라는 견해는 많은 동의를 받는다. 이른바 탈은폐로서의 비평이다. 비평의 영역이 모호하게 되어도, 그것의 출발점은 대상이 된다. 즉 비평은 대상(혹은 현상)이 아닌 것과는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많은 비평가들은 비평의 당위성을 대상과의 관계밀도에서 찾는다. 현상과 유리된 비평은 당위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더 이상 비평이 아닌 사변 혹은 인상이 될 것이다. 이것은 곧 비평이 대상에 종속된다는 것을 말한다.

4.
이론비평이 주도적이게 된 지금, 비평이 이론과 교차되는 지점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비평과 기술(記述)이론의 결합이 시도되는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현대에 ‘비평적 사유’와 ‘비평’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때문이다.(수많은 아포리즘들과, 읽는 행위까지도 비평의 영역으로 포섭된다.)칸트 이래로, 비판적 사유가 철학이 요구하는 필요 조건이 되었음은 자명하다. 그것의 방법론을 자신의 토대로 사용하는 비평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제 이론과 비평을 분리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물을 수 있다. 비평이 기술과 분리되는 지점은, 일차적으로 글쓰기의 형식과 기능에 있으며 이차적으로는 사유의 서술방식에 있다. 통속적으로 이론은 기술 형식의 글로, 비평은 비평 형식의 글로 제시되어 왔다. 이론가들과 비평가들은 자신들의 생산 작업에 새로운 독자성을 부여해왔다. 비평은 스스로의 실천적이고 생산적인 기능을 상실하지 않으려, 이론은 분석과 기술이되려는 것이다. 근대에까지 이르는 실천비평에서는 이러한 분리가 꽤나 성공적으로 행해진다. 그러나 이론비평에서 이러한 기획이 어디까지 가능할까. 비평과 이론이 기능의 측면에서 다른 영역을 전유한다면 서로에 대한 재전유는 쉽사리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자신의 비평이 분석과 기술로 작용하기를 바라고, 이론가들은 자신의 이론이 실천으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이러한 지향성으로 인해 비평과 이론은 끊임없이 서로의 사유 진행방식을 따르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여전히 다른 영역에 남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하게 지적되는 것처럼 이론은 강단에, 비평은 현장에 놓이기 때문이다. 비평이 갖는 특수성은 ‘지금’의 포착에 있다. 귀납적 역사와는 달리 비평은 ‘지금’을 역사화하는 데에 놓인다. 벤야민(Walter Benjamin)에 따르면 역사화는 “어떤 위험한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가는 것과 같은 기억을 붙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스쳐 지나가는 기억으로서의 ‘지금’은 마치 ‘호랑이의 도약’과 같이 선언적으로, 과거를 잡아챈다. 비평은 단순히 기술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비평이 대상 자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 가능성의 제시를 자신의 역할로 자처한다면, 비평의 특수성은 보존된다. 비평만이 가지는 이러한 존재의의는, 비평이 끊임없이 회의되는 와중에도 지속할 수 있는 정당성이다.

4-1.
비평이 현장에 있다면 지금, 비평의 형식은 충분히 유효한가? 비평은 대상의 재현에 머무른다. 여기서의 재현이란, 대상을 체계에 따른 표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비평가가 대상에 대해 사유할 때에, 자신의 인식을 제하고 대상 자체에 온전히 다가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수많은 기존의 인식체계가 대상에의 경험을 재단하기 때문이다. 비평은 ‘견해의 세계’에서 대상의 고유한 경험을 제시하는듯하지만, 그것은 비평가에게 체화된 인식체계를 통해 대상을 상징적 언어로 재현한다. 특히 이론비평과 역사적 비평에서, 체계화된 언어는 대상을 부호화한다. 이러한 비평의 존재조건에서 비평은 대상의 이차적 재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메타적 차원에서만 약호화된 대상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4-2.
단련된 문학 장르, 문학의 하위분과로서의 비평은 서사적 연역으로 전개되는데, 고착화된 서사적 연역의 계층화(문단과 문단 관계에서의 불평등, 본문에 귀속되는 각주 등)를 거치고도 비평이 대상 자체의 코드를 가감없이 드러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든다. 대상이 형식 언어로 치환되는 지점에서 상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재현은 추상화 경향을 가진다.(비평이 대상을 문자화할수록, 그것의 추상화 정도는 높아질 것이다.) 대상이 가지는 범주(Kategorie)의 재현이 비평가가 부단히 노력해야 할 이유 중 하나라면, 비평은 이를 장르적 형식으로만 성취할 이유가 없다.

4-3.
그렇다면 비평은 일종의 직역으로 볼 수 있다.

5.
단일한 비평은 독립성을 갖지 않는다. 어떠한 대상에 행해지는 수많은 비평들이 맞물려서 대상의 세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평가들은 자신의 비평이 독립적으로 기능하기를 원한다. 분석명제로서의 비평은 재귀적 구조에서, 스스로의 제반조건에서 사유를 진행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비평에 대한 메타비평은 그들에게 위협이다. 비평은 꽤 오랫동안 메타적 위치에서 의미를 대상에 삽입하는 권력을 사용해왔고 여전히 그것의 위치를 고수하려 한다. 비평권력은 비평의 응시(gaze)를 거부하고 일방적 시선만을 가지려는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메타적비평의 권력은대상의 배후에서 긴밀한 관계로 남기를 원하는데, 그럼에도 비평이 가지는 추상화의 경향성은 비평이 대상과 멀어지게 만든다. 같은 맥락에서, 비평은 형이상학으로 치닫기도 한다.

5-1.
메타적 비평이 현장에 도래했을 때에, (의도치 않더라도)그것은 격렬한 경험을 정화하고 계몽하려는 시도가 된다.

6.
비평이 대상에 대한 형이상학적 위치에 있는 한, (대상의 존재론 형성에는 기여를 할지라도) 대상이 수용되는 측면에서는 실천적이지 못하다. 대상이 작동하는 곳이 아닌, 메타차원에서의 비평은 대상의 내부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대상의 주변을 부유하는 언어게임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비평들은 흔히 이론화 경향을 보이는데, 특히 분석비평에서 비평은 이론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이론이 자연적 대상의 언어적 정립과 인식의 구축에 기여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론이 대상의 현존과 격렬한 경험의 가능성, 즉 ‘지금’의 실천에도 기여하는가. 비평이 추상화와 형이상학의 경향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비평이 대상에 가지는 위계의 해체가 필요하다. 이론화되는 비평만을 좇는 것과는 달리, 실천으로서의 새로운 비평은 자신의 위치를 탈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천적 비평은 대상의 뒤, 혹은 위가 아닌 대상의 옆에 놓여야 한다. 스스로 전유하던 위치에서 뛰쳐나와 대상과 병치되어야 한다. 새로운 비평은 재현으로서 대상의 총체적 기의(記意)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알레고리(Allegory)로서 대상의 의미형성의 장에 속한다. 작품 수용의 측면에서, 이제 관객은 생산자의 지위를 얻는 것이다.

6-1.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기존 비평의 폐기가 아니다.

7.
벤야민의 알레고리는 기호와 기의의 관계가 임의성을 가진다. 어떠한 완결도 가지지 않으며, 확실한 지시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기존의 ‘상징’으로서의 이론과 비평이 이성의 재단 아래 ‘미적으로 정화된 자연’, 다시 말해 ‘가상’을 제시하는 것에 반해, 알레고리는 현장에 놓여있지 않은 ‘가상’을 다루지 않는다. 또한 상징이 ‘필수적인 유일성’을 추구한다면 알레고리는 종착지를 가지지 않으며 반복되고 유보된다. 상징은 분석명제로서 대상과 일대일로 조응하며 자연적 대상을 이성으로 정화한다. 그러나 총체화된 계몽으로서의 이성은 허구다. 벤야민에게 세계란 질서로 정립된 합리적 역사가 아니라 파열적인 토대다. 그렇다면 이 토대는, 상징이 아니라 알레고리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알레고리는 단지 파편적이며 단편적인 것들, 죽음과 고통, 균열된 미완의 파편들을 늘어놓는다. 결국 알레고리로서의 비평은,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를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계보학적인 것이다. 이로서 비평은 “감정을 자극하는 도발적인 충동과 관계한다”. 로고스(Logos)는 대상을 이해하는 데에 오히려 제약을 설정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담론에서 포스트-미디엄(Post-medium)이 처한 역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Art & Language’ 그룹은 그들의 첫 번째 잡지「Art&Language」에 이렇게 서술하였다. “만약 보는 것이 아닌 읽을 수 있는 내용이 예술이 된다면, 잡지의 창간문 또한 예술이 될 수 있지 않을까”.[1]

7-1.
실천적 비평이 요구하는 전략은 트락타트(traktat)의 방식이다.트락타트를 구성하는 인용문들은 알레고리로서 기능하며 이는 곧 ‘인식의 도약’을 가능케 한다. 모자이크로서의 인용문들은 몽타주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몽타주의 인식은 완결된 것이 아닌, 요소들 사이의 파열된 틈에서 작용하며 이는 새롭고 격렬한 의미형성이 된다. 오로지 인용문들만을 모자이크로 배치하여도, 서로 맞물리는 사태들 속에서 ‘격렬하게 경험되는’ 의미가 피어오른다는 것이다. 예컨대 페이스북과 트위터의 뉴스피드 위에 흩어진 아포리즘들과 단문들은 서로 관계성을 갖지 않지만, 인식의 측면에서 그것들은 몽타주로 재배치된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격렬한 경험의 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아포리즘들은 알레고리이며 끊임없이 업데이트된다. 이것은 ‘지금’의 것들이며 곧 잊혀질 것들이다. 순간에만 경험될 수 있는 이 아포리즘들은 아카이브를 통해서 디지털 사진첩에 저장되어도, 그것이 ‘지금’의 역사와 맞물려야만 형성할 수 있는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이론의 인용문만으로 쓰여진 비평은, 이러한 측면에서 오히려 기술비평보다 실천적이다. 대상을 해체하여 알레고리로 나열하는 것은, 인식의 완결성을 상정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자면 (메타적 위치의) 분석명제로서의 비평은 새로운 인식이 될 수 없다.

7-2.
실천적 비평은 그 자체로 트락타트가 아닌 하나의 요소로서 알레고리가 되어야 한다. 실천적 비평은 이제 메타적 위치에서 대상의 옆으로 옮겨져, 대상의 알레고리로서 또 시뮬라크르(simulcre)로서 기능할 수 있다. 알레고리 구조(대상과 비평의 관계) 속의 알레고리(비평의 내부적 구조)라는 연쇄적 구조에서, 대상과 비평은 병치된 것들로서 몽타주로 의미의 형성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 완결된 연역의 제시가 아니라 의미의 ‘정동’(affect)과 ‘격렬함’으로 체험된다. 비평은 현상에 일조하며 수용자는 그 현상함을 파악한다.



8.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은 기존의 문서비평 형식을 벗어나 시청각으로 대상 영화의 사유를 제시한다.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은 또 하나의 시네마 장르로 스스로를 소개한다. 논의되었던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의 얼개를 살펴보자면,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문서비평은 영상의 직접 인용 불가능으로 한계를 가진다. 유운성 평론가에 따르면, 영화 작업이 디지털화 되는 90년대 후반부터 파운드 푸티지의 실천적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확장되어 ‘영상의 전유와 자율화’가 가능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비평적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문서비평에서는 불가능했던 영상의 직접 인용이 가능한 것이다. 대상 영화의 해체와 재조합, 선택적 배치와 코멘터리의 배치는 새로운 의미형성을 바라보는 듯 하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를 잃기 마련인, 대상 영화에서 떨어져나온 영상들은 자막(혹은 나레이션)이라는 문자적 언어로 본 대상에 다시 한번 종속된다. 또한 (현재까지의)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은 여전히 구조주의적 해석방법을 취한다. 영상과 맞대응하는 자막 (혹은 나레이션)은 단지 그것이 문서의 형식이 아닐 뿐이지 여전히 문자적 언어로 소급되는 것이다. 오디오와 영상은 분리되어 지시대상과 의미로 스크린에 나타난다. 인용된 영상은 스크린에서 부가설명을 위한 도판으로만 제시된다. 언어가 이미지를 지시하는 이러한 행태는, 기존의 비평에서 얼마나 멀어진 것인가. 이것은 언어로서의 상징이라는 측면에서, 결국 기존 비평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9.
인용과 재조합은,비평에서 그러해야 하듯 대상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대상과의 관계는 비평임을 가능하게 하는 동아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용과 재조합의 잠재력은 모자이크와 몽타주로 성취된다. 대상에 대한 견해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비평가의 권력은 여전히 작동할 수밖에 없지만 비평가가 제작한 몽타주의 수용에서 관객 또한 생산자로서 새로운 의미 형성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실천적 비평은 플랫폼이 된다. 트락타트적 재현에 충실하는 것. 그리고 이렇게 ‘우회로서 재현’된 대상의 알레고리는 대상과 병치되어 수용자에게 제시될 수 있다.수용자는 이때 비평을 연역적 서사로 내재화하는 것이 아닌 즉각적인 몽타주 효과로 ‘격렬한’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비평가는 DJ와 같이 수집과 혼합의 작업을 할 것이다.

9-1. 과거 실천비평과 신비평이 그러했듯 현재의 비평도 유효성이 소진되어가고 있다. 비평 위기론은 단일한 이유에서 제기되지 않았다. 실천비평과 신비평에서도, 그리고 현재 비평에서의 존재와 유효성을 관통하는 수사였던 것이다. ‘철학적 비평’의 선두에 섰던 할 포스터가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와 같은 어떠한 것도 현재 유효하지 않다.”고 말한 자조적 고백에서도 나타나듯이, 우리의 인식은 포괄적으로 묶여버린 ‘동시대’라는 범주에서 새롭게 나아갈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2]



[1] Editors of Art-Language, “Introduction”, in: Conceptual Art: a critical anthology,ed. Alexander Alberro and Blake Stimson (Cambridge: the MIT Press, 1999), pp. 98-104, p. 100

[2]Hal Foster 외, “Art Since 1900: Modernism, Antimodernism, Postmodernism” (NY: Thames and Hudson, 2005), p.67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