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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견주 Aug 20. 2023

개조심 이름은 블랙이

쿠싱 증후군 진단받은 날

2022년 가을, 블랙이가 쿠싱 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스테로이드 과다 분비로 인해 여러 합병증을 일으킬 수 있으며 죽을 때까지 약을 먹으면서 조절해야 한다는, 노견에게서 왕왕 발생하는 질병이라고 한다.


11살 블랙이(가명)와 6살 브라우니(가명) 견주의 게으름으로 인해 양치를 자주 하지 못하고 1년에 한 번 스케일링을 받고 있다. 올해의 스케일링 과정에서 마취 전 검사 겸 혈액검사를 진행했는데, 블랙이는 나이가 많다 보니 고급 검사(특: 비쌈)를 받게 했다. 데리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갔더니 블랙이가 우렁차게 짖고 있었다. 면구스러웠던 나는 시끄럽지 않으시냐, 쟤가 성격이 좀 예민하다, 주절거리고 있었는데 수의사쌤이 화면에 띄운 블랙이의 검사 결과 중 빨갛게 표시된 숫자를 가리켰다. 다년간의 검사 경험으로, 빨간색 지표는 예감이 좋지 않았다.


“요비중이라는 소변의 압축률을 표시하는 지표가 있는데, 많이 낮은 편입니다.”


즉, 소변이 묽다는 거였다. 나는 재택근무를 하기 때문에 블랙과 브라우니와 하루종일 붙어있는 데다가, 내가 일하는 책상에서 보이는 곳에 배변패드가 있고 둘의 배변훈련을 위해 늘 오줌 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소변이 묽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기에 솔직히 잘못 보신 줄 알았다.



“다음다뇨 증상이 있을 텐데, 보신 적이 없나요?”

“네! 없어요! 작년 검사에서는 탈수 증상이 살짝 있대서 물그릇을 여러 개 뒀는데, 특별히 많이 마시는 것 같진 않아요.”


단호한 나의 반응에 쌤은 흠,, 하더니 여러 가지 가능성을 설명해 주었다. 호르몬 질병이거나 신장의 문제일 수 있다고, 추가 검사를 해야 알 수 있다고. 우선 그 자리에서 바로 검사할 수 있다는 신장 수치 추가 검사를 맡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스마트폰으로 요비중, 호르몬, 신부전 등을 검색했다가, 기대수명 2~3년이라는 근거 없는 게시글을 보고는, 화면을 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블랙이는 우렁찬 짖음에서도 볼 수 있듯 너무, 건강한 강아지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나의 무지와 부주의함과 맞닥뜨려야 했다. 블랙이는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그다지 더운 날씨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우니가 진작 입을 털고 나간 물그릇에서 계속 찹찹 소리 나게 물을 마셨다. '다음다뇨'라는, 무슨 교훈적인 사자성어처럼 들리는, 그날 처음 들었지만 그 후 1년 동안 징그럽게 나를 따라다녔던 그 네 글자를 떠올렸다. 블랙이는 계속 물을 마셨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냐?" 스케일링으로 인해 오랜 시간 금수를 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블랙이는 배가 올챙이처럼 부풀어 오를 때까지 쉬지 않고 물을 마셨다. 그러고는, 다음다뇨 증상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나에게 정말 보란 듯이, 허여멀건한 오줌을 쌌다. 나는 강아지와 맨날 붙어있으면서도 병증 하나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나 자체는 무신경하고 부주의하고 생각 없는 견주였지만? 과소비 덕에 증상이 심하지 않은 질환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리화하는 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블랙이의 다음다뇨에 대해 늘어놓긴 했지만, 쿠싱이 진행됐을 때의 대표적 증상인 탈모나 헥헥거림 등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신장 문제가 아니라는 소견을 받아 쿠싱 검사인 ACTH 검사를 진행했다. 크지 않은 병원이었고, 원외에 맡겨서 검사결과를 받아오기 때문에 며칠 걸렸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병원을 옮겼다.)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 당시 교제 중이던 j는 같이 가줄까 물었었다. 이미 각오하고 있는 결과를 들으러 가는 것뿐이고 유난 떨 건 아니라고 혼자 갔었는데, 쿠싱이 맞고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코가 찡하고 아파왔다. 그래도 강하고 든든한 견주로 보이고 싶어서, 인상을 쓰면서 눈물을 다시 집어넣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깔고 치료 방법과 약에 대해 논의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것과 같았다. 완치는 없고, 합병증 (무서운 합병증들이 많다) 방지를 위해 죽을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어야 하며,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약봉지를 들고 병원을 나와선,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대상을 찾았다. 11살 밖에 안 된 우리 강아지가 '죽을 때까지' 약을 먹어야 한단다. 첫 화살은 같이 블랙이를 키우다가 두 달 전쯤 독립한 친동생에게 향했다. '블랙이 쿠싱이래' '아이고'. 그녀는 회사였는지 그러고는 답이 없었다. 아이고? 같이 자식처럼 키우던 강아지가 불치병에 걸렸다는데 아이고? 이 여자의 매정함에 분노가 일었다. 동물병원에서도 꾹 참았던 눈물이 삐져나왔다. 어떻게 그렇게 무심하게 대할 수가 있는지, 블랙이가 얼마나 아픈지, 쿠싱증후군이 얼마나 심각한 병인지 쏴 붙였다. - 사실 블랙이는 크게 증상이 없었기에 드러나게 아픈 곳은 없었다 -

오래지 않아 대답이 왔다. '블랙이가 몸 떨길래 검사받아보라고 한 게 나인데 뭔 소리야'

그렇게, 강아지가 종종 몸을 심하게 떠는 것도 '신경질 나서 부르르 떤다'며 웃어넘겼던 나의 무신경함만 돌팔매처럼 돌아왔다.




그다음 타깃은 꽤 친했으나 서먹해진 대학 동기였다. 그녀는 블랙이 또래의 푸들을 키우고 있었고, 사이가 나빠지기 전에 종종 강아지의 건강에 대한 대화를 진지하게 나눈 적이 있었다. 최근 대화 기록이 한 달 전인 그녀가 있는 단톡방 화면을 띄워놓고, 그녀에게 최대한 부담스럽지 않게, 내가 이 빌미로 다시 자주 연락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 티 나지 않게 단어들을 고르면서, 강아지의 투병을 앞두고 우정 회복을 도모하는 나 자신에 대한 비난들을 떠올리면서, 블랙이의 쿠싱 증후군에 대한 우울감은 뒷전이 되었다. '어떡해 ㅠ 약 잘 먹으면 괜찮을 거야' 싱겁게 끝난 일방적인 하소연을 닫고, 집에 돌아오자 블랙이와 브라우니와 '죽을 때까지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과 나만 남게 되었다.


블랙이가 10살이 되자마자 나는 '이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며 근처의 반려동물 장례식장을 리스트업 해뒀는데,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 때문에 '시크릿'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주에서 블랙이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건가, 하는 죄책감이 들러붙었다. j를 오라고 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잠시 들었지만, 그래도 블랙이의 주인으로서 혼자 소화하고 책임져야 할 감정들이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블랙이의 다음다뇨 증상을 몰랐고, 동생도 아는 몸 떠는 증상을 몰랐으니, 감정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며 '죽을 때까지'의 레이스를 완주해야 한다는 사죄 마인드가 되었다.




사실 이 글을 쓰다 만지 너무 오래돼서, 블랙이는 쿠싱 증후군을 진단받은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생각보다 심각한 건 병원비 영수증 말고는 없었고, 생각보다 길어진 것 같은 여정 속에서 약을 잘 챙겨 먹고 있다. 지금도 내 다리에 엎드려서, 털을 폴폴 날리며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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