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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선 최금희 Jun 27. 2024

한식을 아시나요?

북한의 '한식 & 청명'에 대한 추억

언젠가 꿈속에서 엄마와 언니를 만나서 이야기하다 잠에서 깼다. 정확히 4월 5일 청명이었다. 다음날이 한식이라 어김없이 가족을 만나는 것 같았다.  우리 고향에서는 이곳과 달리 일 년에 한식과 추석 두 번 산소를 찾아가는 풍습이 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한식과 추석 각각 하루만 공휴일이었다.     

보통 산소로 갈 때 집집마다 제사음식을 대야에 담고 머리에 이고 가는데 산으로 가는 도로 양쪽은  올라가고 내려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곤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버스나 기차로 산소가 있는 산 가까이로 최대한 이동하고 버스노선이 없는 곳에서부터 걸어간다. 남한에서 추석날 도로가 차로 막히는 진풍경이라면 북한은 도로는 텅 비고 양옆이 사람들이 줄을 선 듯 길게 늘여진 진풍경이 연출되는 셈이다.


아빠와의 추억     

어릴 적 나는 한식이나 추석이 되면 아빠의 손을 잡고 종종 작은 아버지 산소를 다녔었다. 아버지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러웠던 막냇동생이었는데 서른도 안 돼서 돌아갔다고 한다. 한식에는 봄이라 산소에 가면 진달래 꽃이 활짝 피어있어서 철없는 내가 산에 올라가자마자 꽃을 뜯다 돌아오면 아버지는 엄마가 챙겨준 음식을 비석상에 차리고 말없이 동생과 마음을 교환하신 듯 서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나는 늘 그렇게 한식과 추석이 되면 작은 아버지의 산소 앞에 서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곤 했고, 작은 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사진으로만 보고 산소에서 첫 만남을 가진 셈이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는 병환으로 51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셨다. 늦둥이 막내인 내가 15살인 해였다. 봉건적인 가부장 분위기가 많이 남아있는 북한 사회에서 우리 집에서는 유독 다른 세상이었던 것 같았다. 아버지는 늘 인자하고 따뜻하셨다. 과학자인 아버지는 항상 칼퇴근해 오시고, 의사인 어머니는 중환자가 생기거나 하면 퇴근시간이 늘 늦어지고,  언니와 오빠는 대학생이라 저녁 8시쯤인가 통근기차로 집에 돌아오는 관계로 내가 방과 후 집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만나는 가족은 아버지었다. 또래 친구들이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나는 아버지와 많은 추억을 쌓은 것 같다.  

   

매일 저녁 나는 아파트 복도에서 아버지의 인기척을 들으면 거실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아버지 다녀오셨습니까." 하고 90도 인사를 올렸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우리 막내 얼마나 또 컸나"하며 나를 번쩍 들어 안으시곤 했다. 아버지는 오늘은 좀 가볍네, 밥 많이 먹어야겠다~ 혹은 오늘은 어제보다 무거워졌구나, 우리 막내 많이 컸네~ 하고 뽀뽀를 해주셨지...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날 숨을 거두시기 바로 몇 시간 전에도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았던 나다. 그래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을 15살 나는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평소에도 늘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일 년 중 거의 3개월은 병원에서 시간을 보내던 아버지였다. 하지만 가실 때에는 집에서 엄마의 옆자리에서 편안하게 가셔서 어머니는 그것을 정말 다행으로 여기셨다.   

  

이틀간 집에서 아버지의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받고 삼일 째 되는 날 산에 올라갔다. 산소를 정할 때 어머니는 작은 아버지의 산소가 너무 멀어서 해마다 힘들었다면서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야산에 모셨다. 그런데 그 산에 이미 산소가 너무 많아서 아버지 지인들이 돌고 돌다 가장 높은 곳에 안장했다. 그 후 매년 산소를 오르내릴 때마다 어머니는 경사가 심한 이 높은 곳으로 아버지를 모실 때 아버지 지인들이 너무 고생했겠다면서 정말 고마운 분들이라고  늘 외우군 했다.


한식과 청명과 진달래

우리나라에서 한식은 설,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에 속한다. 동지() 후 105일 또는 그 이튿날이라고 하는데 24 절기의 다섯 번째인 청명(淸明)과 하루 차이거나 겹치는데 그 시기가 대략 4월 4일~5일 즈음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라는 속담이 내려왔다.

(사진출처: https://blog.naver.com/ysyang0815/223065358597)


북한에서도 한식이나 청명을 거의 동일시 여겼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 집은 늘 한식이나 청명에 산소에 가서 겨우내 죽은 잔디를 걷어내고 새 금잔디를 얹고 주변에 작은 소나무나 꽃을 심고 오곤 했다. 그리고 하산할 때는 어김없이 진달래나 함박꽃을 꺾어와서 거실 꽃병에서 피워내곤 했다. 대여섯 살부터인가 아버지 손을 잡고 작은 아버지 산소에 갈 적부터 진달래를 꺾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다.


어머니의 의식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식(혹은 청명, 어쨌거나 휴일은 딱 하루)에 아버지 무덤을 찾을 때마다 우리 어머니께서 제일 먼저 하는 의식이 있었다.


아버지 산소에 올라가면 우리는 너나없이 아버지 무덤을 한 바퀴 돌면서 맘속 인사를 한다. 때론 어머니와 막내인 나는 소리 내서 아버지 하고 부르기도 했다.


다음에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 올라간 음식을 차리고 아버지에게 절을 하기 전 먼저 무덤 위쪽에 약간의 음식을 묻어두고 술 한잔 올리고 절을 했다. 내가 그 이유를 물으니 산신령에게 아버지를 잘 지켜줘서 고맙고 또 잘 지켜달라고 인사하는 거란다.


어머니가 50년대 의대를 다니고 의사가 되신 신녀성이셨기에 "종교는 아편"이라고 신랑 각시 궁합 보는 것도 질색하던 분이 산신령에게 인사를 올린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어떤 간절함을 그렇게 달래셨지 싶다.


남북한의 망자에 대한 예의가 조금 다른 것 같다.


고향에서는 망자에게 항상 세 번 절을 했다. 한국에 오니 두 번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걸 모르고 남편 회사 대표님의 모친상 때 찾아가서 우리 부부가 세 번 절을 했다. 나중에 몇 번 더 장례식장에 가서 보니 두 번 절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세 번 절하는 것이 몸에 배여서 지금도 나는 장례식장을 찾을 때마다 절할 때 맘속으로 두 번만 하려고 애쓴다. 성인이 되어 탈북했기에, 습관이란 참 무섭다.


(사진출처: 데일리NK, 2020.4.6.)


아직 살아계실지 생사를 모르는 우리 어머니, 내가 아버지에게 절을 할 때마다 "아이고 당신이 제일 곱아하던(예뻐하던) 막내딸이 인사하네요~)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항상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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