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신입의 일곱 번째 이야기
점심 식사 후, 여지없이 밀려오는 졸음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커피라도 한 잔 해야겠다.’라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서던 그때, 내가 속한 팀의 상무이사가 다가왔다.
“김 차장, 커피 한 잔 할래?”
마침 잘 됐다는 생각에 그를 따라 지하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그가 나에게 커피를 산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가 있는 행동이었다.
“이번에 인사고과 있는 거 알고 있지?”
“네”
“응, 지금 있는 우리 팀 얘들(팀원들) 평가 좀 해줘.”
“네? 그건 상무님이 하셔야 할 일 아닌가요? 저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는 나에게 팀원들의 평가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었다. 남을 평가해본 일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특성상 부서 직원들의 평가는 부장급 이상의 팀장들이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일을 나에게 맡긴 것이다.
그가 말하는 명분은 간단했다.
자신보다는 내가 그들과 직접 일을 하고 있으니 더 자세하게 그들을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것은 두 가지의 분명한 이유가 있다.
첫째는 자신의 손에 더러운 것을 묻히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누구는 점수를 높게 주고, 누구는 낮게 주는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해야 할 때, 그는 나를 핑계 삼을 수 있다. 그들을 이끄는 팀장이 준 점수이니 이것을 받아들였을 뿐이라는 변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들을 평가할 수 있을 정도의 권한을 나에게 주었으니 자신에게 더 충성하라는 의미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자신이 나를 신뢰하고 있으니 그만큼 더 자신에게 복종하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나도 이 바닥을 20년 넘게 살아온 기술자다.
그리고 누구보다 이 회사에 대한 애착이 없는 사람이기에, 그의 의도를 무시한 결과를 내놓았다.
가장 낮은 점수를 준 직원과 나의 점수를 거의 비슷하게 맞추었다. 같이 일을 하다 보면 수준에 못 미치는 직원도 있고,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기술자도 있게 마련이다. 그들을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도 그와 비슷한 점수로 낮췄다. 내가 그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는 있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 이해력도 많이 떨어지고.”
“네, 그래도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친구입니다. 일과 시간에 졸지만 않는다면요.”
상무이사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자기는 왜 그렇게 낮은 점수를 준 거야?”
“제가 원래 뛰어난 엔지니어가 아닙니다. 중저가 또는 보급형 엔지니어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도 그렇게 일하고 있고요.”
“사람 웃기기는. 그래도 팀장인데.”
‘중저가 엔지니어’, 내가 항상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평가다.
큰 회사에서 다양한 일을 경험해 본 것도 아니고, 구체적인 분야를 전문적으로 깊이 아는 기술자도 아니다.
작은 사무실에서 남들 뒤치다꺼리하는 것이 나의 주된 업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러 건물을 급하게 정리하고 빠지는 일에 정신없이 몰두하고 있다.
“오늘 내가 어디 어디 갔다 왔는 줄 알아?
오전에 이라크 갔다가, 점심 먹고 베트남 넘어가서 야근할 때쯤 되니까 군산에 도착해 있더라고.”
하루 동안 다루었던 건물들의 위치를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엔지니어로서 근본적인 기술을 습득하기보다는 단순한 스킬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기에 바쁘다. 짧은 시간에 건설회사가 원하는 도면을 만들고,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바로바로 채워 나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거기에 더해 ‘중저가‘라는 표현은 낮은 연봉과 낮은 회사 복지를 비꼬며 내뱉은 중의적인 말이기도 하다.
관리자들이 하는 이야기 중에 가장 많이 듣는 주제가 ’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 ‘는 것이다. 더군다나 기존에 있던 경력직 엔지니어들도 급속히 빠져나가는 처지이다. 결국 그들을 붙잡고 새로운 기술자들을 채용할 수 있는 것은 회사 차원에서 그들을 ’ 고급 엔지니어‘로서 대우해 주는 것이다. 꿈같은 말이겠지만, 어린 엔지니어들에게는 일을 배울 기회를 주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은 어리지만, 그들도 프로이기 때문이다.
올 초, 처음 회사에 입사할 때만 하더라도 새로운 기술을 이용한 설계를 진행할 것이라는 부서장의 설명에 엔지니어로서의 새로운 방향을 찾은 것 같아서 기뻤다. 나의 관심과 이해를 충족해 줄 수 있는 회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입사 당시에 여러 가지를 포기하면서까지 이곳에 들어왔다. 당연히 연봉은 낮추었고, 수당 없는 야근에도 동의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다니는 회사는 여름휴가가 없고, 연차를 매달 모아서 휴가를 간다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것까지도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나에게 있어 가장 답답한 지점은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활용할 수 있는 부서에서 기존 부서로 이동되었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 나이에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것보다 기존 기술을 활용해서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니냐고.
일면 수긍이 가는 이야기다. 부장을 넘어 소장을 해도 늦은 지금의 나이에 새로운 기술까지 배우겠다는 것은 개인적인 욕심일 수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갈망해 왔던 것을 지금 와서 포기하라는 것은 엔지니어로서의 근성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내가 투자한 시간과 돈을 대비해도 맞지 않다.
거기에 더해, 누구보다 먼저 해외 현장에 파견을 보내주겠다는 약속도 지켜지기 어려울 것 같다. 줄줄이 빠져나가는 중간 관리자들로 인해 팀을 꾸리고 나갈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부서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관리자들은 나를 이곳에 오래 붙들어놓고 싶어 할지도 모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상무이사와의 저녁 식사 중에 들었던 끔찍한 이야기다.
“회장님이, 참, 사람이 좋아. 그래서 직원 자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셔. 자기만 열심히 하면 우리 회사에서 70까지도 일할 수 있어.”
-70살? 안 자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가는 거겠지. 훅.
이곳에 오래 있다가는 노후 대책으로 일만 하게 생겼다. ‘돈이고 뭐고 간에 일만 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였을까?
상무이사, 그와 이야기하는 내내 그의 모습에서 나의 미래가 투영되는 것 같았다. 그동안 의견 충돌이나 약간의 감정 섞인 말다툼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오늘따라 70까지 이곳에서 일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이 불쌍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는 ‘중저가 엔지니어’로서 잘 버텨왔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 일을 지탱할지 모르겠다. 돈보다는 신념을 쫓아온 이곳에서 원치 않는 배신감을 계속해서 느낀다면, 나는 지쳐갈 것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엔지니어로서 나의 삶은 그리 길지 않다. 그래서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다녔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장소, 그리고 더 나은 자격조건 등.
어쩌면 인내의 한계에 일찍 다다를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이 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 다시 떠날 채비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