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용기를 내서 한번 써보기로 했다.
나는 생각을 뱉어내고 싶을 때면 습관처럼 글을 썼다.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일기 같은 글. 철저히 나를 위한, 당시 의식의 흐름이 그대로 보이는 날 것의 글이다.
글을 쓰고 나면 복잡했던 감정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쓰기 전에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깨달음이 찾아온다. 마음이 아까보다는 조금 더 깨끗해지는 기분도 든다. 그래서 글을 쓰는 행위가 참 좋다.
되돌아보면 어릴 적부터 생각이 가득했다. 가족을 둘러싼 비밀, 그리고 주변 세상에 대한 의문… 밝고 명랑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내면은 늘 질문과 외로움으로 가득했던 듯하다.
나이가 들 수록은 생각을 열심히 글로 쓰게 되었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혹시라도 부모님이 내 속마음을 보게 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돼서 그럴까? 특히나 해외에서 살기 시작하면서는 도저히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날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런 내가 한편으로 타인이 내 감정과 생각이 담긴 날 것의 글을 본다고 생각하면, 왠지 쑥스럽기도 하며 (마치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SNS도 거의 하지 않게 되고, 블로그도 매번 망설이다 쓰지 않게 되곤 했다. 비슷한 이유로 유튜브도 해보고 싶지만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누가 내 생각을 읽고 나라는 사람에 대해 단정 지을까 봐, 혹시라도 어떠한 생각을 잘못 풀어내서 오해를 살까 봐, 관련된 지식이 부족한 것이 들통날까 봐, 혹은 나의 경험이 자랑처럼 보일까 봐, 내 글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봐 등등... 갖가지 이유로 내가 쓴 글이 타인에게 노출되는 게 걱정되었던 것 같다.
그간 주변 사람들에게 ‘있잖아, 나 사실 나중에는 작가로 살고 싶어.’라고 습관처럼 말해왔다. 스스로를 위해, 혹은 업무용 글쓰기가 아닌, 불특정 다수의 타인에게 글을 공유하는 것은 여전히 두려워하면서.
그러다가 얼마 전 ‘작가가 되고 싶다면 오늘 당장 글부터 써라'와 같은 글귀를 보았다. 뜨끔했다.
나를 위한 글과 타인과 공유하고 싶은 글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왜 타인과 생각을 공유하는 작가가 되고 싶었을까? 이 글을 쓰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인간은 누구나 공감을 얻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에서 나라는 존재를 이해받고 싶어 한다. 예를 들면, '사실 이러한 일이 있었어요. 나는 이렇게 느꼈지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어요'와 같은 자기표현을 통해, 타인이 나의 마음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게 되고, '당신도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야만 하는 당신만의 이유가 있을 거고요.'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통해, 타인 또한 위로를 받게 되는 것. 그렇게 '나'라는 존재에 대한 온전한 인정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의미와 형태는 각기 다를 지라도,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살아가며 경험하는 보편적인 것들에 대해 우리는 비슷하게 생각하고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 나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도 한번 되돌아볼 수 있게 된다. 또 무언가를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변하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아예 새로운 생각을 얻게 되기도 한다.
나와 다른 타인의 언어를 통해 경험하는 자극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소리 없이 건드리며, 되도록이면 나에게 도움되는 쪽으로 변화를 이끄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알아차렸든 못했든.
나는 글이라는 수단이 품고 있는 이러한 에너지에 매료된 것 같다. 공감을 통한 존재간의 깊이 있는 연결.
힘들었던 순간에 마음을 단단히 잡고 다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던 것도 누군가의 문장이었고, 그들의 경험에서 우러난 생각들이었다. 내가 마음을 열고 바라보면 주변에는 나를 성장하게 도와주는 문장 투성이다. 자연스럽게 나도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도움을 주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글쓰기 열풍이 도는 것 같다. 누구나 마음만 먹고 실행하면 자기가 쓴 글을 타인에게 내보일 수 있는 환경.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써, 타인과 소통하는 수단으로써, 글 쓰는 것을 원하고 또 권하는 사람 또한 많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에세이를 한번 써보기로 결심하고 나서 오래전 나의 직장 상사이자 카피라이터이신 Y님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저 사실 늘 에세이가 쓰고 싶었어요. 지금 이 시기에 제 이야기에 대해 쓰고 싶은데, 요즘 글 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걱정돼요." ('잘 쓴 글들이 너무 많고 위로와 공감의 목소리들이 너무 많아서 솔직히 제 이야기는 묻힐 것 같아요' 뭐 대략 이런 마음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메시지는 짧았지만 용기를 주었다.
"책 쓰는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니 얘기는 너만 쓸 수 있어."
아.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내가 겪어온 일에는 그때의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와 그 안에 내가 독자적으로 부여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또 내가 느낀 감정이 여전히 내 안에 살아있다. 똑같은 이야기를 누가 더 잘 쓰고 못쓰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 이야기니까, 오로지 나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아무쪼록 앞으로는 나의 이야기를 조금씩 타인과 공유하면서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그랬어. 혹은 나는 이랬어. 너는 어때?’라는 무언의 위로와 공감의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왕이면 진지하지만 술술 읽히는 담백한 글을 쓰고 싶다. 그러려면 부지런히 글을 써야겠지!
마지막으로 글을 쓰고 다듬는 과정에서 나 또한 다시 한번 스스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쓰다듬어 줄 수 있기를. 때로는 ‘잘했어. 애썼어’라고 다독여주고, '그때 그래서 그렇게 느꼈구나. 지금은 좀 어때?'라고 질문해 볼 수 있기를.
그러니까 오늘부터 용기를 내서 한번 써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