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살이 7년 차에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2년 전,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당시 나는 런던 살이 7년 차였다. 어렵게 얻은 취업비자 그리고 영주권 취득 기회 포기, 4년을 만났던 연인과 그곳의 친구들을 뒤로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선택이었다.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런던에서 살 것인가.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마음에 품고 지내다 보니, 어느 날 한국에 가서 살아볼 수 있는 기회가 불쑥 찾아왔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결정이었다. 스스로도 ‘과연 이게 맞는 결정인가’ 계속해서 불안해하고 의심했다. 잠이 오지 않고 심장이 쿵쾅거렸으며, 며칠 째 아침에 일어나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우울감이 몇 달간 반복적으로 왔다 갔다 했다. 오죽했으면 (그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딸이 귀국하기를 바랐던) 아빠조차도 ‘그렇게 힘들면 오지 않아도 돼'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공항에서 연인과 작별인사를 하고 눈물을 펑펑 쏟아내면서 생각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내 발로 한국으로 걸어 들어가다니' 여전히 스스로의 결정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나는 사실 런던에 오기 전에는 가족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가족이라는 둘레가 갑갑했고, ‘방 안의 코끼리'와 같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점들이 나를 슬프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20대에는 미국과 유럽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아, 이런 사회라면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겠어'란 확신이 있었다. 당시 나는 여기보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기대감과 이루고 싶은 꿈이란 것이 있어야만 생명감 넘치는 활발한 존재로서의 생존이 가능한 상태였다고나 할까.
혼자 낯선 땅에 와서 살아남기 위해 낑낑대며 나름대로 힘든 순간들이 참 많았다. 그래도 즐겁고 뿌듯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내 삶의 의미를 실행하고야 말겠어’라는 집요한 의지가 있어 가능한 것이었다.
런던에서 살면서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꼭 한국을 방문했는데, 런던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는 날이면 어린 조카와 작별인사를 하고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눈물을 훔치곤 했다. 옆에 있던 친오빠는 약간 당황한 듯했고, 나도 내가 조카를 이렇게나 애절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돌이켜보면 그 마음이 꼭 조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넓게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이었으며, 부정할 수도 없이 내 정체성 뿌리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만약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국에 가서 산다면, 나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과거에는 불만족했지만, 지금의 나는 또 그때의 나와는 다르니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먼 훗날 여전히 타국에서 이방인으로써 살아가면서 더 외롭고 힘든 삶을 살고 있진 않을까?
수많은 질문이 내 머릿속을 가득 매웠다.
이 선택이 어려웠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몇 년 뒤 취득할 수 있었던 영주권 때문이었다.
*영국에서는 5년/10년 (같은 유형의 비자로 5년 체류한 경우/여러 비자로 체류한 경우는 10년) 단위로 영주권을 신청할 수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학생비자/워홀비자/취업비자 순으로 다양한 비자를 취득했었는데, 당시 회사를 더 다니거나 새로운 회사에서 취업비자를 받을 경우, 약 2년 후 영주권 신청을 할 수 있었다. 만약 도중에 다른 비자로 전환을 한다고 하더라도 10년짜리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었기에 지금 한국에 가서 6개월 이상 산다는 것은 영주권 신청 기회를 포기해야 함을 뜻했다.
앞으로 한국에서 살지 영국에서 살게 될지, 사람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인데... 다시 영국에 돌아온다면 0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 그간 목표를 향해 쏟아부었던 시간이 모조리 상실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몇 달간 의사 결정을 지연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네 마음이 이끌리는 데로 해. 지금 한국을 가고 싶다면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너 지금 회사에서 많이 힘들어했고 가족들도 많이 보고 싶어 했잖아. 영주권이야 다시 영국에 들어올 마음이 들면 그때 다시 시작하면 되지. 물론 힘들겠지만 그래도 서류상 형식적인 것보다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아?”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일하는 거는 한국 갈 마음이 확실히 들 때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거 아냐? 그간 쌓아온 노력이 아깝잖아. 나 같으면 일단 영주권은 받아 놓고 나중에 좀 더 편히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때 한국에 한번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그때마다 그들이 하는 말에 공감했다.
사실 이 이야기를 가까이에서 가장 많이 나눈 것은 나의 연인 M이었다. 내가 한국에 돌아가는 것은 물론 본인이 바라는 것이 절대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M은 결정적으로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나는 너를 늘 옆에서 봐왔잖아. 언젠가는 네가 가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풀어야 할 이야기가 있잖아. 네 마음의 평화를 조금 더 일찍 찾기 위해서는 지금 한국에 가서 살아보는 것이 맞을 것 같기도 해. 여기 있으면서 고민하는 것보다는 힘들더라도 UJ스타일 데로 가서 부딪혀보고 경험해보는 거지... 만약 언젠가 네가 한국에 가서 살게 된다면 그게 지금이지 않을까?”
보통의 연인들은 상대가 떠나지 않고 옆에 있어주기를 은근히 강요할 법도 한데, M은 상황을 최대한 나의 관점에서 함께 바라보며 결정을 도와주었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지?
어떻게 해야 내 인생의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지?
M말대로 사실 나에게는 내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오랜 런던 생활로 인해 이방인으로서의 삶에 피로가 쌓여 있었다. 언제부턴가 이 곳에서 생활이 너무 익숙해졌고,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도전하고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비자 때문에 이직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신분 또한 너무 답답했다. 마음을 비우고 다시 새로운 꿈을 꾸기 위해서는 휴식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더 이상 런던에서 살까, 한국으로 돌아갈까 고민만 하고 싶지 않았다. 직접 살아봄으로써 해소해 보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다 문득 아래의 문장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았을 때 자신이 했던 일이 아니라 하지 않았던 일을 후회해.’
지금 한국에 가지 않으면 나중에 내 인생을 되돌아보았을 때 후회할까? 일단 내 마음을 다 잡기 위해 끊임없이 일기를 썼다. 기록해놓지 않으면 내가 그 당시 왜 그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 나중에 납득할 수 있을만한 충분한 증거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때 나는 이 선택으로 인해 예측되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물론 2년이 지난 지금 그 글을 다시 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아주 꼼꼼했던 시나리오였지만 코로나는 예측할 수 없었기에.
어릴 적부터 중요한 일을 앞두고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외웠던 말이 있다.
‘용기를 내자. 행운은 용기 있는 자가 얻는다.’
이번에도 그 주문은 유효했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우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용기가 생긴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행동하면 정말로 행운이 나에게 올 것 만 같은 왠지 모를 자신감도 생긴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나는 지난날 나의 선택이 옳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코로나가 터지면서 영국에 있는 M과 일 년 반을 못 만나게 되었을지 라도, 내가 하게 된 일이 기대했던 것과 차이가 있었더라도, 이 여정에 배움이 있었고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나의 오랜 인연들과도 다시 연결될 수 있어서 감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내가 런던에서 살아야 할지 한국에서 살아야 할지에 대한, 조금의 힌트를 얻었다는 것도.
최근 나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2년 전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그냥 흘러가는 데로 지내다 보니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결과가 예측된 시나리오조차도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평소에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어떤 선택을 하든 거기에 나만의 타당한 이유가 생긴다.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누가 뭐라 하든 '나는 나의 선택을 믿는다'는 자세로 밀고 나가야 한다.
내가 왜 그 선택을 하는지 모르는데, 타인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은 또 얼마나 모순적인가. 그렇지 않으면 타인의 의견, 세상이 옳다고 하는 목소리에 이끌려 어설픈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삶의 어느 순간에 나도 모르게 무너질 수가 있다. 물론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해도 위기는 삶의 도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지만... 다만 스스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 아닐까.
때로 너무 형식적인 결과에 지나치게 집중하다 보면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면의 가치가 흐릿해질 때도 있다. 나의 경우에는 비자와 영주권, 그런 서류상의 형식적인 것을 포기했어야 했는데, 사실 그 선택을 했어도 나는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더 빨리 깨닫진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영영 모르게 될 수도), 형식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은 선택을 한 스스로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나의 힘든 순간에 옆에서 지지를 해준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이다.
개인이 하는 선택에는 개인의 삶과 가치, 개인의 입장과 사고방식이 묻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에는 정답이 없는 것 아닐까? 개개인마다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 다 다르기 때문에.
나는 이제 중요한 선택을 할 때, ‘나를 성장으로 이끌어주는 길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 어떤 성장을 하고 싶은가?’와 같은 질문을 우선으로 둔다. 결국은 지금 나의 마음이 어디에 더 가치를 두느냐이고, 그랬던 나의 마음을 미래의 나의 마음이 존중해 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
지금 내 마음의 의문을 너무 뒤로 미뤄두지 말자. 한번 꼬이면 그 꼬임의 근원이 인생의 어느 순간에 더 꼬인 형태로 찾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2년 전 내가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을 당신에게도 슬며시 건네본다.
"What do you need to get on with now to learn what you need?"
(당신이 필요로 하는 배움을 얻기 위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