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back?
1.
판데믹으로 서울에 갇힌 베를린 유학생. 코로나가 막아둔 국경을 뚫고 베를린에 돌아왔다.
6개월동안 한국에서 쌓여버린 짐을 2개의 캐리어와 2개의 백팩에 꾹꾹 눌러담아 간신히 베를린 집 앞에 도착했을 땐, 반년동안 비워둔 집 상태가 생각보다 더 처참하진 않기를 바랐다. 그래, 어떤 생명체들이 집 안에 식구만 이루지 않았으면 되는거지 하며 용기 가득한 마음으로 전자식 열쇠를 가져다댔지만 삑삑삑 문은 열리지 않았다. 오래 사용하지 않은 탓에 문고리의 전자칩이 망가진 것이다. 인력을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일(열쇠공, 기숙사 관리인..)이 멈추는 독일의 주말에 속수무책인 나는 내 몸보다 무거운 짐을 끌고 호텔로 향했다. 주말 특별 근무비라며 문 하나 여는 데에 250유로(대략 한화 35만원)를 이야기하는 열쇠공을 부르느니, 차라리 기숙사 관리인이 출근하는 월요일 아침까지 호텔에 머무는 비용이 더 저렴하기 때문이기도 했겠으나, 열쇠공을 기다릴 힘도 없을뿐더러 그 값을 지불하기엔 상황이, 사람이 너무나 괘씸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도저히 들어갈 방법이 없음을 받아들이고 꽃과 나무가 예쁘게 핀 기숙사 뒷편에서 엉엉 울기바쁘던 나 대신, 독일에 사는 친구 Y와 그녀의 남자친구, 그리고 그녀의 동생이 재빠르게 호텔을 예약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기숙사 옆방 친구들이 짐을 잠시 맡아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호텔에 갈 힘 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날 밤 나는 영혼에 상처를 입었다고 확신하며 잠들었지만, 다음 날 아침엔 뜻밖의 호캉스가 되었네 하는 여유로운 생각까지 들었던걸 보면 사람은 제법 괜찮게 설계되었나보다. 이게 다 항상 유난히 밝고 멋진 베를린 햇살 때문이기도 하다.
2.
비행기 3번의 취소 끝에 돌아온 베를린.
오랜만이라고 문을 쉽게 열어주지 않던 내 이름을 가진 나의 집에 간신히 돌아온 나는 2주 째 칩거 중이다. 첫주는 건드리면 부서질듯 무리한 내 몸이 한발자국이라도 밖에 나가면 탈이 나버릴것처럼 보여 비타민B, 비타민 C가 가득 든 Heiße Zitrone(레몬차), 마그네슘을 챙겨먹으며 달래주었다. 조금 걸어볼까 싶어 나간 둘째주에는 실외에서도 마스크를 쓰는 내가 신기한듯 쳐다보는 눈빛에 눈치를 잔뜩 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베를린의 대중교통이나 카페, 음식점은 한국보다 철저하리만큼 빨갛고 굵직한 글씨로 Bitte,1,5 meter Abstand halten!(1.5미터 거리를 유지하세요), Einstieg nur mit Maske!(마스크를 쓰고 승차하세요), Sitzvervot an diesem Tisch(착석금지) 같은 말들이 적혀있었고, 모두가 바닥 간격유지 스티커에 발을 맞추며 마스크를 꺼내썼다. 하지만 신선한 공기속에선 코로나 바이러스도 전염성을 잃는다는듯 나를 제외한 그리고 아주 가끔 보이는 한국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실외에선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설상가상 어제는 집 앞 대로변에서 30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코로나 조치(Corona Maßnahmen-대중교통 및 실내에서 마스크 착용 의무 등) 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방에서도 들리는 시위대의 소리에 차마 나가보진 못했으나(거리 유지와 마스크 없이 몇만명이 모여있는걸 보니 무서웠다),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가 최우선이라는 시위대의 생각은 도대체 무엇일까 싶어 뉴스를 틀었다. 'Corona ist eine einzige Lüge.(코로나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야)'라는 시위대의 인터뷰를 본 나는 당분간은 홈바디로 살기로 다시한번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