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D 아니고 AND
‘뭐든 시작이 중요한 것’, ‘시작은 언제나 설레는 법’
이라는 문장을 아주 여러 해 만났었다. 이제 더 이상 시작은 설레지 않고 성가셔졌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관록이 늘어난 존재가 됐다. 시작하지 않은 일의 시작을 상상한다. 시간이 중간쯤 흘렀을 때의 상황파악을 거쳐, 현실적인 결론들을 내리면서 시작은 어느새 없었던 일이 되어있다. 그렇게 생각의 집을 짓고, 시작을 상상하고 마무리 짓고 그러다 어느덧 도대체 그래서 첫 문장이 뭔데, 언제 쓸 건데 하다 지금이 됐다.
그럼 왜 지금이냐고, 이제야 시작하게 된 거냐고 묻는다면 이에 대해 또 할 말이 참 많다.
처음부터 이렇게 꼬여버린 인생은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또 시작이라는 단어를 소환해 와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인생의 시작이었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럼 꼬여버린 인생의 시작부터 시작하면 되겠다.
꼬여버린 인생의 시작은 어떤 첫 문장으로 시작해야 할까? 스물다섯이 시작이다. 이 문장으로 시작하면 되려나? 아니 이 문장은 너무 평범하다. 그래도 글쟁이로 살았다는 사람의 첫 문장 치고는 호기심을 유발하지도, 색다르지도, 감각적이지도 않은 문장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써내려 온 이 말장난 같은 문장들을 모두 삭제하고 그냥 덩그러니 ‘스물다섯이 시작이다.’로 시작한다면? 그나마 호기심은 유발하는 문장은 될 수 있겠다 싶다.
이렇다. 이렇게 첫 문장의 시작을 두고도 아직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이 상황처럼 언제나 시작은 ‘뭘 시작하나’로 시작해 시작을 경험하지 못한 채 그렇게 현재의 시간들을 흘려보냈고, 그게 쌓여 지금까지 왔다.
그러던 어느 무더운 여름, 휴가지에서 우연히 들린 서점에서 한 권의 책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책 제목은 바로 <내가 무슨 노벨문학상을 탈 것도 아니고>. 작가님의 외침에 공감하고 또 공감했다. 책 소개에 ‘여기에 한 무명작가가 있다. 그녀가 쓴 웹소설은 유로 구매 별점이 50개도 안되고, 에세이는 1 쇄도 다 팔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글을 쓰고, 또 쓴다. 마치 보답받지 못하는 짝사랑처럼. 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그녀의 정신승리 가득한 일상을 통해 그 기묘한 열정의 원동력을 탐구해 본다. “글을 쓰고 싶으면 부담 갖지 말고 그냥 한 번 써보세요. 노벨문학상 탈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매일 밥벌이 현장에 끌려 나가며 내뱉는 마음의 소리가 바로 ‘이 일로 지구를 구할 것도 아닌데, 그냥 하자. 대충 하자.’다. 그러면서 그다음 마음의 소리로‘받은 만큼만 하면 된다.’라는 주문 아닌 주문을 외우면서 하루를 견뎌내고, 버티며 지금 여기, 현재라는 시간을 살아내기 정신없었다. 내가 쓰고 싶은 ‘첫 문장’은 그렇게 매번 생계에 치여, 희망으로 짓밟힐까 두려워 미루고 미루며 밀려나 버렸다. 밥벌이는 그렇게 매일같이 하자하자 하면서 열정 아닌 열정을 불태워놓고, 진짜 내가 열정으로 불태우고 싶은 것은 가슴속 깊은 곳에 고이 접어 가둬 두었던 것이었다.
나는 게으른 완벽주의자도 아니다. 그저 게으른 겁쟁이다. 잘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완벽하지 못할 것 같아서 하고 싶은 것들을 미루고 미루는 그런 미룬 이. 어느 순간 내일의 내가 알아서 잘 해낼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도 묻어 둔 채 그렇게 포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고구마답답이. 퍽퍽한 밤고구마 같은 내게 그 책은 사이다와 흰 우유 같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뭐든 시작하고 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부터가 그렇다. 그리고 퍽퍽한 밤고구마의 목메는 맛에 밤고구마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다.(밤고구마 선호하는 사람 바로 나야 나) 목메게 먹다 흰 우유 한 모금했을 때 그 맛. 취향존중시대에 삶의 취향도 존중해 줘야 마땅하다. 더불어 일평생 게으른 겁쟁이는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다. 밤고구마 같이 목메게 살다 보니 사이다 한 모금, 우유 한 모금이 더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재능도 없는 자가 하고 싶은 일에 목멘다고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가혹한 평가를 내리고 있던 때에 만난 책으로 인해 ‘첫 문장’으로 시작한 글의 단락을 마무리 지어보려 한다. 나의 취향은 밤고구마. 퍽퍽하지만 그 퍽퍽한 맛으로 먹는 밤고구마. 내 삶의 취향도 그와 유사한 답답한 외길인생. 그 외길에 간간히 사이다 한 모금, 흰 우유 한 모금 씩 가뭄에 콩 나듯 칭찬과 격려로 답답함을 밀어내며 느리게 살아가는 그런 인생. 어쩌면 답답함이란 묵묵히 우직하게 한 우물만 파는 그런 인생일지도 모른다고 오늘도 숨 쉬기 위해 합리화 한 우유 한 모금을 투척하며 그렇게 첫 문장을 마무리 지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