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프로 관객의 부산국제영화제 탐방기 ①
10월이면 부산에 간다. 바다를 보기 위함도 아니고, 돼지국밥을 먹기 위함도 아니다. 그저 온전히 영화를 보기 위해서 부산에 간다. 이렇게 얘기하니 뭔가 영화에 업을 삼은 멋진 예술인같이 느껴질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나는 그냥 앉아서 관람하는 것이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프로 관객러일뿐이다. 단순히 보는 것이 좋아 이거 저거 찾아보다 보니 어느새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국제)에까지가서 앉아 있게 됐다.
이렇다 할 전문지식 없이, 특별한 목적 없이 그저 새로운 나라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신선함 하나로 매년 가을 부산을 찾게 됐다. 1N 년 전, 부국제를 보러 부산을 찾았을 땐 삶의 고민이 많은 때였다. 생각만 많지 현명하게 고민을 정리하거나, 고민 해결을 위해 행동으로 실행하거나 하는 사람도 아닌지라 복잡한 마음이 일 때면 생각을 쌓고 쌓아 스스로를 괴롭히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부국제기간이라는 뉴스를 보게 됐고, 고민의 온도를 좀 낮춰 줄 겸 영화나 실컷 보고 오자는 마음이 일어 부산으로 향했었다.
사실 지금 어떤 영화가 첫 영화였었는지 기억의 조각이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한국, 미국, 일본, 홍콩이 아닌 다른 나라 영화를 봤던 것만은 선명히 기억한다. 영화의 줄거리도 낯설었지만, 생소한 언어를 듣고 처음 보는 배경들을 보며 평소 보던 영화와 다른 새로움이 너무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후 매년 부국제를 욕심내게 되었다.
부국제는 보통 10일간 진행되는데, 현생에 묶여있는 프로관람자는 당연히 생업으로 인해 영화제 기간 모두를 참여할 수는 없다. 어떤 해는 당일치기로, 어떤 해는 1박 2일로, 또 어떤 해는 퐁당퐁당으로 (영화제 개막 초반에 하루 참여, 중반에 하루 참여) 시간과 열정과 돈을 쏟아 가며 영화를 보러 간다. 그렇게 매년 조금씩 다니다 보니 부국제가 좋은 나름의 이유가 장착됐다.
첫 번째는 흔히 볼 수 없는, 국내에 개봉하지 않는 내 기준 '한정판' 영화들을 탐미할 수 있음이다. 물론 유명 영화제 수상작이나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영화들이 국내에 수입도 많이 되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접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세계는 넓고 영화는 많다. 경로는 다양하나 세계 모든 영화가 유통되는 것은 아니기에 쉽게 접 할 수 없는 영화를 볼 수 있다는 매력을 끊어낼 수가 없다.
다음은 매년 여러 국가로 해외여행을 다니는 기분이 든다는 점이다. 세계와 지리에 큰 흥미가 없던 자에게 타국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더구나 여행을 즐겨하지 않는 자에게 다른 나라는 그냥 진짜 다른 나라다. 한국이 아니니깐 당연히 언어가 문화가 정서가 다르겠지. 그렇게 까칠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한 여성은 부산에서 러시아영화를 한 편 보게 되고, 그 영화 한 편으로 러시아 여행을 다녀온 기분을 느낀다. 이후 이 여성은 부국제에 가야 하는 이유로 '극강의 가성비로 즐기는 세계여행'에 대해 떠들어 대곤 한다.
더불어 이 여행은 단순히 다른 언어를 듣고, 다른 배경을 보는데만 그치지 않는다. 짧은 시간 다양한 문화권을 접하게 되니 각국의 정서나 문화가 보다 뚜렷하게 다가오는 역설적 효과가 발생한다. 무엇보다 세계각 국의 정서나 사회문제들을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어 견문이 넓어진달까. 다양한 영화들이긴 하지만 묘하게 공통된 정서나 소재의 흐름이 존재한다. 이 흐름은 정확한 통계나 데이터에 의한 것들이라기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 의한 것이지만 내가 본 영화들 기준으로 나만의 '올해의 영화흐름'을 만들어 보는 것도 즐거움 중에 하나다.
그렇게 의식의 흐름대로 나만의 올해 영화흐름을 만들다 보면 자연스레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조금 이른 한 해 결산을 하게 되니 남은 2-3달을 아쉬움 없이 보내기 위한 결의를 다지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 이 결의는 남은 한 해를 끝까지 뭐라도 해보겠다는 의지를 갖게 하며 묘한 에너지를 발휘하게 해 준다. 물론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집에 도착하는 순간 현실과 마주하면서 에너지 상실의 맛을 통해 일상복귀가 빠르게 이뤄지지만.....(그렇다 지금 이 소리는 의지는 작심삼일 일 뿐이라는 소리를 포장 중이다) 그래도 좋다. 일상공간이 아닌 곳에서 에너지를 얻은 경험은 번아웃 예방에 매우 효과적이다. 이 짧은 경험은 한 인간의 정신승리회로를 매우 가열차게 돌아가게 한다. 이 회로는 외로운 현대인의 가을이 쓸쓸하지 않게 낭만적으로 느껴지도록 돕는다.
또 하나는 부산에 가는 10월을 생각하며 밥벌이를 견뎌낸다는 것이다. 특히 무더운 여름날 아침 출근하기 싫은 날이면 '곧 부산에 간다'는 나만의 주문을 외우며 현생을 버틴다. 영화관람과 더불어 곧 탁 트인 바다를 보며 느낄 시원함, 파도멍을 때리며 생각을 비워낼 낼 수 있다는 희망은 현생을 이겨낼 수 있게 한다. TMI 일 테지만 내 꿈은 매년 10월이면 부산광안리에 보름 살기를 하면서 부국제 영화기간에 매일 같이 영화를 몇 편씩 보러 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부국제는 가기 전엔 삶을 견디는 에너지를, 다녀와서는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를, 영화제 중에는 각 종 희망과 에너지를 선물하는 요물이다. 이쯤 되니 영화보다는 그냥 영화를 보기 위해 어딘가로 향하는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긴 하지만, 부국제가 좋은 이유는 말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