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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to Apr 12. 2023

#8. 차곡차곡

술과 차, 다시 술과 차, 그리고 술

2월 다회에 참여하기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오랜만에 만난 선후배와 이런저런 수다를 떠느라, 새벽까지 여러 술을 섞어먹은 탓에(코로나 상황으로 인하여 가게에서 마시지 않은 터라 더더욱),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정말 세상이 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와인, 맥주, 보드카를 번갈아 마시면 안 된다는 건, 언제나 그다음 날의 숙취가 깨우쳐 준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오늘 다회는 가지 말까? 술냄새를 풍기며 가봤자 차를 즐기지 못하는 거 아닐까? 갑자기 열이 나는 것 같네? 와 같이 회사 가기 싫은 핑계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다회에 못 나가겠다는 핑계들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올랐다.


얼굴빛이 왜 그래요?


차라리 해장을 차로 하자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몸을 이끌고 찻집 'D'에 도착했을 때, 쌤이 나에게 건넨 말이다. 술병에 걸린 티가 질린 얼굴색으로 나타나는 나를, 쌤은 안타까움 반, 말 안 해도 알만하다는 마음 반이 섞인 시선으로 쳐다보셨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어쩜 좋아! 오늘 웰컴 드링크를 술로 준비했는데, 마실 수 있겠어요?"


"...... 어른이 주시는 술은 거절하는 게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평소에는 지혜 넘치는 어른들의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주당들의 흔한 핑계를 질린 낯빛을 하며 뻔뻔하게 대답하는 나를, 쌤이 어떻게 생각하셨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다우들도 한 마디씩 얹었지만, 쌤이 따뜻한 잔에 데운 정종을 따르자 다들 조용해졌다.


"아직은 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어서, 차를 마시기 전 기분 좋게 몸을 데우시라고 첫 잔은 따뜻한 정종으로 준비해 봤어요. 취하지는 마세요! 특히 맞은편의 남성분!"


해장차를 기대했는데, 해장술이 왔네요라는 농 같지도 않은 농담을 한 후, 입에 술잔을 가져간다. 따뜻한 정종이 온몸에 온기를 불어넣어 준다. 적은 양의 술이지만, 2월의 한기가 곁에 다가오지 못한다. 술병이 나서 기절할 것 같다고 징징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묵과 함께 정종을 한잔만 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따뜻한 술이 지나간 자리에, 녹차와 함께 차가운 젤라또가 놓인다. 하동녹차와 녹차 젤라또가 잘 어울린다. 젤라또를 사이에 껴서 먹으라고 준비하신 모나카 안에, 달지 않은 팥소가 들어있다. 너무 달면 속이 뒤집어졌을 텐데, 쌤이 직접 만드신 음식들은 자극적이지 않은 편이라, 속이 불편할 때 먹어도 어렵지 않게 들어간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차곡차곡'이네요?


"차곡차곡이요?"


"차(茶), 곡(穀), 차(茶), 곡(穀). 차 마시고, 술(곡주) 마시고를 반복한다는 차 마시는 사람들끼리의 우스갯소리에요. 옛 선비들도 차하고 술을 번갈아 마셨다는 말이 있는데, 조상들의 좋지 않은 것을 따라 하는군요."


표현이 재미있다. 쌤이 키득키득 웃으시면서 말해주신 '차곡차곡'이라는 단어를 듣자, 속에 와인과 보드카, 그리고 정종이 차와 함께 겹겹이 쌓인 것 같다. 난 '곡차곡차'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차곡차곡'이던 '곡차곡차'던 나를 위한 단어라고 여겨진다(집에서 말하면 등짝 스매시가 날아오겠지).



"이번에 마셔볼 차는 '무이암차' 중에 '금라한'이라는 차입니다. 무이암차라고 하면 보통 '대홍포'나 '철라한' 등 소위 4대 명총이라 불리는 차들을 위주로 들어보셨을 거예요. '철라한'과 같은 차들은 저희가 이전 다회에서 마셔본 적이 있어서, 오늘은 조금 더 향이 깊고 오래가는 '금라한'을 준비해 봤습니다."


'무이암차'는 중국의 무이산에서 나는 청차계열의 차들이다. 이름에 '암'자가 들어가는 것처럼, 무이산 자체가 암석으로 이루어진 산이라, 차나무가 암석 위에서 자라난다고 한다. 몇 종류의 무이암차가 있는지는 세는 사람들마다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수백 종류의 차가 존재하는 것은 확실하다.


"제 혀에는 '철나한'보다 향이 강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다우분들도 맛있으셨으면 좋겠네요."


이름 때문인지는 몰라도 '암차'의 종류를 마실 때, '암향'이 옅게 느껴진다. 이끼맛이라고 해야 할지, 돌의 맛이라고 해야 할지. 실제로 핥아본 적은 없지만, 아침에 바위틈 사이로 흐르는 안개 낀 시냇가에 가면 맡을 수 있는 향이 차를 통하여 전해져 온다. 목으로 넘기면 그 뒤에 입 안에 고소함과 단향이 남는다. 그 잔향이 '금라한'은 강한 편이다.



다회는 계속된다. '철라한'에 이어 보이차와 아쌈 홍차가 쉬지 않고 내려진다. 그와 곁들이는 토마토수프와 포카치아, 딸기 판나코타와 쿠키까지.


"해장은 잘했나요?"


제대로 했다. 차뿐만이 아니라, 쌤이 내주신 음식도 속을 편하게 만들었다. 원래 해장을 하는 편이 아니지만, 이렇게 해장을 할 수 있다면, '차곡차곡'이라는 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다음 다회 전날은 또 술을 마셔야겠다는 불온한 생각이 든다. 아! 그럴 필요가 없구나.


차를 마셨으니, 술을 마시러 가야겠다.

사진들은 원작자의 허락을 받고 이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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