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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to Apr 16. 2023

모르는 곳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

산 호세 - San Jose

처음 만난 건,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였다. 나와 그녀는 같은 소속하에서 교육을 받고, 모금 활동을 했으며, 브라질까지 함께했다. 스페인어와 영어, 포르투갈어까지 할 줄 아는 그녀와는 다르게, 한국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 때문에, 서로 많은 대화를 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모두가 타지로 여기는 곳에서,
몸짓발짓일지언정 소통하며 지낸 8개월의 시간은,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우리'로 여겨지게 했다.



'지나가는 길이라면 들려라'는 의례적인 작별의 말에, 그녀의 고향인 코스타리카(Costa Rica)의 산 호세(San José)를 방문하게 된 것은, 4달이 지난 후였다. 브라질의 한 작은 마을에서 헤어진 동양인 남자애가, 본인의 고향에 진짜 나타날 거라고 기대하고 인사말을 남겼었을까? 어찌 되었든 나에게 있어서, 산 호세는 지나가는 길 위에 있는 도시이자, 잠시 머무를 수 있는 도시였다.


¡Hola!


버스 터미널을 나오던 중 뒤에서 들린, 익숙하다면 익숙한 그녀의 인사. 그 인사에 몇 개월 간의 긴장이 풀렸다. 익숙하지 않은 곳을 혼자 여행한다는 긴장감이 몇 달 동안 계속되었어서,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엄청난 안도로 다가왔다.


크리스마스를 포함 한, 일주일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을 그녀의 가족과 함께 보냈다. 그녀의 친척들이 모두 함께한 크리스마스이브 만찬에도 초대받았고, 그녀의 여동생 생일에 비건 레스토랑을 방문하기도 했다. '장의사'였다는 그녀의 아버지와 드라이브도 하고,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맛있는 커피를 찾았다. 모든 일들이 익숙하지 않음에도, 안전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아는 사람'이 '모르는 곳'에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코스타리카는 미국인들이 은퇴 후 이민 가고 싶어 하는 나라로 순위 안에 항상 꼽힌다. 산 호세의 경우 고산지대에 위치하여 있기 때문에, 1년 내내 활동하기 좋은 기온을 유지하고, 중남미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여러 도시를 방문하다 보면, 살기 좋은 도시와 여행하기 좋은 도시를 나누게 될 때가 있는데, 산 호세는 살아보고 싶은 도시에 속한다.


관광으로는 특별하게 기억 남는 것은 없다. 그곳에서 그녀의 가족과 머물면서 있었던 시간들도, 여행이나 관광에 목적을 둔 행위보다는, 즐거운 일상을 함께 했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 일상의 연장선 상에서 동네 친구들과 캠핑을 갔다. 흔히 중남미를 떠올릴 때 떠오르는 정글과는 다른, 숲 속의 연못가에 텐트를 쳤다. 거창한 바베큐가 아니라 간단한 샌드위치를 씹으며, 불을 피운 뒤 둘러앉아서 늦은 시간까지 코코아를 마셨다. 당연히 잔잔한 음악과 함께.


¡Pura vida!


그래. 말 그대로 순수한 삶이네. 잠자리에 들기 전 서로가 나눴던 코스타리카의 인사말에 대해서, 지금 상황보다 어울릴 수는 없겠다와 같은 느긋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코스타리카 치고는 약간 쌀쌀한 12월의 밤, 숲 속에서 꽤 깊은 잠에 빠졌다.

  



이야기가 이렇게 마무리되면 좋았을 것을. 다음 날 아침, 텐트가 좁아 밖에 내놨던 짐을 도난당했다. 간단한 옷가지들만 있었기에 피해는 크지 않았다. 이 숲 속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나는 어둠을 뚫고 여기까지 온 도선생들의 노력에 감탄하며, 쓰러진 보온병에서 커피를 따라 마셨다.


다른 짐들은 숲 속에서 전부 발견되었다. 뒤져도 가져갈 게 없었겠지. 대신, 유일하게 사라진 하나가 내가 가지고 다니던 카메라(좋지 않은)여서 친구들이 난리가 났다. 멀리서 온 지인이 코스타리카에 대해서 나쁜 기억을 가지고 돌아올까 봐,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은 나보다 더 분개했고 주변을 이 잡듯이 뒤졌다.


숲 속에서 나의 빈 가방을 찾아서, 이마에 땀을 맺힌 채로 소중한 듯이 껴앉고 돌아오는 그들을 보며, 정작 아무렇지 않았던 나 역시 해줄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Pura vida!


괜찮아. 인생이 그렇지 뭐. 이때 어울리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너희들이 있어서 괜찮다. 혼자였다면 놀랐을 텐데, 너희 덕분에 편안함을 느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코스타리카에는 좋은 기억만을 가지고, 위의 인사말을 너희에게 바친다.


ⓒ photo by tropa66 on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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