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2009.09.16.
그녀가 숨을 거두었다는 연락이 왔다. 가깝지 않은 사람이 명을 달리해도 찾아가 보는 것이 우리네 도리며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그녀가 나와 가까운 사람인지 아닌지를 떠나 세상과 이별한 이를 찾아보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임에도 설핏 망설여진다. 나와 오롯하게 관계된 사람이라 할 수도 없지만 엄밀히 따지고 들면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꽃다운 스물의 나이를 그냥 흘려보내고, 그 시절로 치자면 재취 자리나 꿰찰 나이인 스물일곱에 남편을 만나 혼인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르겠다. 친정어머니 말로는 팔자소관이라더라. 그 시절 이미 꽃잎 떨어진 나이라는 스물일곱에 번듯한 총각과 휘황한 혼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때껏 선하게 살아 그런 복을 누리게 된 것이라 그리 생각했었다. 적어도 혼인하던 그날 저녁이 되기 전까진 그런 생각을 품었더랬다.
혼인날 겨우 하나 찍은 흑백의 사진 속에선 그래도 엷은 웃음을 띠고 있는 걸 봐선 그때까진 혼인이 내게 줄 단꿈을 분명 품고 있었던 듯하다. 신혼여행이랄 것도 없던 그 시절 그저 혼인식만 올리고 문턱 높은 시댁의 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얼마나 기가 찰 일이 기다렸던가. 혼인식 때 보이지 않던 시아버지는 치매로 정신을 놓고, 시어머니는 중풍으로 한쪽 팔을 쓰지 못한 채 몸져누워 있었다. 거기까지면 마음씨 웬만하고 어른 공경 잘하는 내가 기함을 할 일도 아니었다.
막 새댁과 신랑이 된 나와 남편이 집으로 들자, 어딘가에서 튀어나왔는지 마루에 가들막하게 아이들이 쪼르르 앉아 제비 새끼들처럼 입을 오물거리며 뭐라 재재거렸다. 조금 전 내 남편이 된 그 남자를 그 어린 제비들이 아버지라 불렀다.
한 번 혼인을 하면 이미 남의 집 사람이며 죽어서도 남자 집 귀신이 되어야만 하는 줄 알았던 그 시절, 나는 그 기막힘을 어디다 하소연할 길 없이 이젠 남편이 된 남자에게 망연히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래요? 저 아이들의 아비가 진정 당신이란 말인가요?" 남자는 입을 닫은 채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던 사람처럼.
나는 혼인한 첫날밤을 눈물로 범벅이 된 베갯잇을 부여잡은 채 지새우고, 남편은 맥없이 하염없는 담배만 피워댔다. 매움한 담배 연기로 숨이 막힐 지경이 될 때까지 남편은 그러고 앉아 있다, 새벽이 절반 이상은 방 안으로 들어왔을 무렵 잠이 들었다. 나는 잠 한숨 청하지 못한 채 퉁퉁 부어 오른 얼굴을 하고 시어른 아침진지를 위해 어둑새벽에 일어났다. 새하얀 앞치마를 허리에 질끈 동여매며 다짐했다. '모든 것이 내 운명이요, 내 몫이라면 견뎌내리라, 헤쳐가리라!' 그러나 그렇게 만만한 운명이며, 몫은 아니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은 나를 아줌마라 불렀다. 단지 저희들 아비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아이들에겐 내가 천하에 둘도 없는 나쁜 여자였다. 내가 없으면 나가버린 제 어미가 다시 올 거라며 당시 다섯 살을 갓 넘긴 넷째가 울며불며 떼를 쓰기도 했다. 어느 날 큰 아이가 미처 치우지 못하고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일기장 속에서의 나는 "마녀"라 불리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네들이 믿건 안 믿건 저희들이 건강하고 심성 곱게 자라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간간이 거짓말을 하고 물건을 훔치는 나쁜 행동을 지적하고 야단쳐도 그네들은 그저 내가 친엄마가 아니라 그리하는 것이라, 무조건 그렇게만 믿었다. 아비가 저희들을 야단쳐도 내가 부러 일러서 그런 것이라 믿었다. 여러 애먼 일이 있을 적마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 그런 것이라 내 속을 다독였다.
속아 혼인을 했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그리했건 상관없이 나는 아이들 엄마이며 며느리여야만 했다. 손톱 밑이 피가 날 정도로 방바닥을 긁기 시작하던 시아버지의 대소변을 돌아가시기 전 일곱 달 남짓 받아내면서도 한 번도 내 신세를 탄한 적 없었다. 병든 시어른 봉양하는 것이야 자식이면 의당 해야 할 기본적 도리라 생각하며 살았다. 중풍을 앓긴 했지만 정신은 말짱했던 시어머니가 가끔 찾아오는 시누이에게 애꿎은 내 험담을 해도, 동안 서운하게 해 드렸던 게 무언가 되짚어보려 했지 달리 미워하는 마음은 먹어보질 않고 살았다.
그 이면엔 남편의 나를 향한 진심 어린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를 속이려 했다기보다는 말할 시기를 놓쳤다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싶었다. 그에겐 말 못 할 저간의 사정이 있었고 그것은 온전하게 진실이었다. 설령 남편에게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 해도 그를 내칠 만한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배 속에 이미 생명 하나가 끈질기게 나를 붙들려 애썼기 때문이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두 달여 만에 내 목숨과도 같았던 그 아이에게 세상을 보여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에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늘 미안하였다.
시어머니는 배 속의 아기가 태어나고 자라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살다 가셨다. 함께하는 동안 그리 불편한 몸을 하고서도 내 하는 일이면 사사건건 마뜩잖아했다. 유독, 장손인 큰 아이가 나로 인해 친엄마 없는 설움을 겪을까 몹시도 저어했고, 내가 어쩌다 큰 아이에게 잘못을 야단하거나 잔심부름이라도 시킬라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내게 엄준하게 "그러지 마라!", 일갈했다.
아이들이 친엄마를 몰래 만난다는 사실은 그네들끼리 하는 쑤군거림 속이나 큰 아이의 일기에서 쉽게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의 입장에선 아비가 만나지 마라 한다 해서 어미와의 연을 어찌 끊을 수 있었겠는가. 아이들이 불안 속에 떨며 제 어미와 만나게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남편에게 청했다. 연유야 어떻든 아이들을 두고 나가버린 전처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는 남편은 완강하게 반대했지만, 결국 아이들을 배려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그 후로 아이들은 편하게 친엄마와 오갔다. 그때 내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론 그날 이후 지금껏 난 그 아이들에겐 제 엄마 자리를 꿰찬 나쁜 아줌마로 남았을 뿐이었다.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나에 대한 아이들의 마음이 그렇다 할지라도, 어미의 따뜻한 정이 그리웠을 그 시기에 친엄마를 만나 잠시나마 그들의 마음이 평온할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내 결정은 옳은 것이었다는 생각이다.
배 속의 아이가 태어나면서 온전하게 공평하리라던 내 마음은 그러질 못했다. 내 속으로 낳은 새끼 입에 무엇이든 하나라도 더 넣어주고 싶고 한 번이라도 더 보듬어 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딴에는 애정을 고르게 쏟는다 했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 해서 마음을 그대로 내보이며 살진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큰 아이들은 저희들과 같은 성씨를 쓰는 그 아이를 아주 예뻐했다. 반이긴 하지만 핏줄은 알게 모르게 서로 당기는 게 있는 것이라 혼자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같은 배 속에서 나지 않은 아이들의 어울림은 기대만큼 오래가지 못했다.
세월은 흘러 장성한 큰 아이들은 모두 각자의 가정을 꾸렸다. 그러기 전에 이미 그들은 친 어미를 찾아 함께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남편의 정식 여자로 세상에 등재되지 못한 채 친정 오라비 아래 적을 두고 있었다. 큰 아이들과 그들의 어미가, 내가 세상을 향해 떳떳한 엄마와 아내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들의 반대는 남편도 어찌하지 못했고 내 아이가 가정을 꾸리기 두 해 전에 남편은 세상을 등졌다. 큰 아이들은 그 후로 소식을 끊었고, 나는 결국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 엄마이자 아내로 남았다.
내 아이도 어느덧 혼인할 나이가 되어 사귀는 남자를 데리고 왔다. 대단한 집의 내로라하는 자제였다. 다소 꺼림하였으나, 내 아이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미 남자의 아이를 배 속에 두고 있어 말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 친정어머니도 그때의 나와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마치 맞추기라도 한 듯 내 아이가 혼인한 나이도 스물일곱이었다. 내가 혼인하던 그 시절 노처녀로 치부되던 나이가, 혼인하기엔 다소 이른 나이가 된 것이 다르다면 달랐다. 내 나이 스물일곱 꽃잎 떨어지는 나이였지만, 내 아이 스물일곱은 이제 겨우 꽃잎 벌어지는 나이였다.
대단한 집안의 사위를 본 덕에 나는 내 이름 석 자를 내어놓지 못하고 큰 아이들 어미의 이름을 둘러업고 딸의 혼인식을 치렀다. 그날 그 좋은 날, 내 아이도 나도 울었다. 엄연한 제 어미를 두고 다른 이의 여식으로 세상에 알려진 내 딸과, 꽃보다 더 고운 딸을 두고도 내 이름 석자를 딸아이의 이름 위에 올리지 못하는 어미가!
딸자식은 대개가 친정 어미의 팔자를 닮는다며 재취로 살았던 내 어머니가 나의 혼인 이후 안타까움을 한숨으로 뱉으며 말했었다. 내 어머니의 삶을 지켜보았기에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는데 결과는 어머니와 한치 다를 바 없었다. 그나마 내 딸은 음전한 사위를 만나 아무 탈 없이 살아가는 것이 못내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랬던 내 아이가 첫 딸을 낳고 두 해 만에 찾아와 울부짖으며 어미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전했다. 가슴을 뜯어놓고 싶었다. 이미 가슴은 갈가리 찢겨 처참하게 나달거렸다.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원통하고 애통해서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었고 그저 피가 솟구치고 온몸에 화기가 뻗쳤다. 나로 인해 내 아이마저 내 팔자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만 같아서 그저 딱 죽고만 싶었다. 속절없이 속울음만 삼켰다. 내가 그렇게 사는 건 견뎌도 내 새끼가 나와 같은 삶을 사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리되었단다. 무슨 연유로 내 어머니에 이은 나와, 거기에 내 아이까지. 왜 이런 지독한 대물림을 치러야만 하는 것인지. 정말 거부하고 싶은, 괴이한 운명의 못된 짓이다.
내가 친정어머니를 떠올리며 살았던 것처럼, 내 아이도 나처럼 묵묵히 버티며 산다. "살면 다 살아지는 게 또 삶이에요, 엄마!"라며 마치 다 산 듯한 사람처럼 말한다. 그래서 더 아프다. 내 아이의 큰 아이 둘은 2주에 한 번 자연스레 제 친엄마와 만나는 날이 정해진 모양이었다. 내 아이 역시 아직은 세상이 인정하는 엄마도, 아내도 아닌 채로 살아간다. 나와는 달리 곧 인정을 받는 날이 올 것이라며 나를 안심시킨 지 벌써 두 해가 더 지났다.
누군가의 두 번째가 아닌 처음이고자 하는 마음, 이등이 아닌 일등이고 싶은 마음, 둘째가 아닌 첫째의 자식이고픈 마음, 쓰던 것이 아닌 새 것을 갖고 싶은 마음…. 나도 내 딸도,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자의든 아니든 각자 내면에 감춰진 그 마음들을 쉬이 드러내지 못한 채 산다. 내 어머니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순간 이미 내겐 그 '처음'이 가지는 설렘과 벅참은 내려놓아야 했다. 부끄러운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내 아버지의 처음이 아닌 여인의 딸로 살아가는 것이, 당당하려 했지만 이내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작아지기만 하는 그 바꿀 수 없는 사실이 못내 서럽고, 아팠고 또 외로웠다. 내 딸도 나처럼 그러했으리라, 짐작되어 가슴이 쓰라렸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험난한 길 위를 또 나처럼 걷고 있으니….
오늘 내 아이와 남편의, 법적 어미이자 아내인 그녀의 부고장을 받았다. 큰 아들이 보낸 것이다. 남편의 죽음 후에 딱 한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다. 고단한 삶이 녹아있는 그녀의 어설피 짓는 미소가 내내 마음에 쓰였었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그녀의 삶도 측은해 보였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 삶이긴 하나, 남편의 정을 오롯이 느끼고 살아온 나였기에, 그녀 입장에선 남편 곁에 이름으로나마 남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토록 내 이름 석 자 세상에 올리는 것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어느 부분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흉허물을 떠나, 그녀는 남편의 처음 사람이었기에 그녀 자신은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가질 수 없는, 알 수 없는 당당함을 지니고 있다. 내 어머니가 그랬듯 나도, 그리고 머지않아 내 딸아이도, 늘 상대의 그 떳떳함에 아니, 어쩌면 정작 우리가 떨치지 못하는 그 설움에 재차 무너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봉투에 조의금을 챙겨 넣었다. 큰 아들이 굳이 알린 걸 보면 오라는 의미인 것도 같고. 내일 인편에 보내야 할지 내가 가야 할지를 몰라 딸에게 전화를 넣었다. 아이는 내게 가지 마라, 한다.
몹시도 쓰렁한 가을밤이다.
오래전 글을 올린다. 너무 진부해 나조차도 머쓱하지만 그냥 올려본다. 이제는 진부한 글조차도 쓰기가 힘겹다. 집중은 어렵고 항상 첫 문장에 걸터앉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