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갈팡질팡 치매동반기
나는 한 직장에서 26년간 일했다.
가끔은 일이 재미있을 때도 있었고 보람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지겨울 때가 더 많았다.
그건 아마도 진급이 느린, 불운한 아니 불쌍한 나의 처지 때문일 수도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지만 물론 이건 주관적인 판단이다. 번번이 진급에서 누락되는 일이 반복되면 보통은 자격지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또 나 역시도 그런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회사 일을 하지는 않았던 거 같다.
또 회사의 진급도 정치판과 같아서 줄 서기, 아부하기 등의 여러 신공이 출중해야 가능하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야 좀 위로가 되니까.
하여간 속으로 생각하는 나의 회사 생활의 좌우명은 '손가락질받지 않을 정도로 일하자'였다.
회사 생활 중에 머릿속에 늘 맴도는 생각은 '회사 가면 죽는다'라는 책에서 본 "중세에는 농노가 있고 현대에는 회사원이 있다"는 글귀였다. 그러니까 나도 죽기 살기로 일하는 농노는 아니고 언제나 약간은 삐딱한 마음으로 생활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아무튼 나는 무지하게 오랜 세월을 한 회사에서 그럭저럭 공개적인 손가락질을 받지는 않고 다니다 정년 2년을 앞두고 중국 대륙으로 진출했다.
남들이 보기엔 무지하게 용기가 있는 멋진 이직이었지만 막상 가고 보니 나에겐 엄청나게 무지하고 무식한 이직일 뿐이었다. 한 달 만에 6킬로를 본의 아니게 감량을 했으니....
일단 중국어를 못하고 아는 말이라곤 발음도 틀린 "세세" 정도였다.
한 육 개월이 지나서 정신이 좀 차려지니 그 외에도 "워 아이 니, 이, 얼, 싼...." 그 정도도 알고는 있었다.
한마디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그래도 나의 무지막지한 인내심으로 3년 9개월을 중국에도 버텼다.
그 기간 동안 나름대로 일하는 재미도 있었고 출장으로 중국 대륙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재미도 쏠쏠했다. 담당 업무가 공연 개발이니 남들이 보기엔 공연 보러 유람 다니는 형국이었을 듯하다.
하! 내 돈도 안 들이고 내몽고부터 리장까지 가보다니 거의 횡재 수준이었다.
게다가 중국 현지인들하고 다니니 구석구석 현지 맛집도 가보고 즐거운 나날이었다.
물론 말을 못 하니 귀머거리에 벙어리에다 원래도 눈치는 좀 없는 편이지만 알아듣지를 못하니 눈치도 더 없어져서 마음도 아주 편안한 상태가 되어 그게 더 좋았다.
집안 사정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왔다. 나의 원대한 계획은 퇴직하고 세 달 정도 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쿄, 하와이, 뉴욕, 런던, 베를린, 바르셀로나에 가서 한주 혹은 두 주씩 머물면서 수다도 떨고 현지 맛집도 가 보는 것이었었다. 원래 꿈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2월 25일 서울로 돌아와서 2월 26일부터 손자를 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손자를 돌보는 것은 나에게는 나름 신선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 후로 2년 뒤 친구가 치앙마이로 세 달 살기를 실천하러 떠났다. 그리고는 숙소도 있으니 놀러 오라고 유혹을 하는 바람에 홀라당 넘어가서 일단 비행기 표를 샀다. 문제는 엄마를 어떻게 해야 하나가 큰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1박 2일 정도는 혼자 계실 수도 있었는데 8박 9일을 엄마 혼자 지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중간에 돌아올 확률이 더 커 보였다. 일하는 딸에게 아기를 보면서 엄마도 돌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단기보호센터였다. 그때의 내 생각엔 데이 케어 센터에서 단기 보호도 하면 참으로 좋겠단 생각을 했었다. 얼마나 이상적인가! 그러나 내가 사는 성북구 주변엔 그런 곳은 없었다.
더구나 단기 보호 센터조차 찾기가 어려웠다. 데이케어센터에서 소개해 준 동대문구에 있는 단기 보호 센터에 어렵사리 예약을 했다. 이것도 엄청난 행운이었다.
이 단기 보호센터는 엄마를 마지막으로 단기보호 센터 업무는 종료를 했기 때문이다.
단기 보호센터는 명절이나 휴가 때를 제외하면 거의 이용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유지하기가 힘들어서 운영 중단을 결정했다고 했다. 이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은 입소하기까지의 절차가 복잡하고 이용하는 기간은 짧으니 별로 이용하고 싶은 생각이 안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반드시 치매 노인만 입소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필요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유용한 시설이란 생각도 했지만 수요 공급이 맞지가 않았다.
단기보호센터의 입장에서는 까다로운 조건을 맞춰서 시설을 만들었는데 이용하는 사람이 없으면 적자 운영을 해야하니 유지하기가 어려울 듯 싶었다.
보건복지부 직영으로 이런 시설을 많이 만들어주면 참 좋은 노인을 위한 나라가 될 거 같다.
단기 보호센터는 1달에 9일간 이용할 수 있고 1년에 4회 이용가능 하다.
입소하기 전에 보건소나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해서 전염병 유무를 확인한 증명서를 제출하고
단기간이라도 계약서도 작성해야 한다.
출발 이틀 전에 엄마를 단기보호센터로 모시고 갔다. 만약에 적응을 못해서 문제가 생기면 가서 돌아오는 것보다는 취소하는 것이 합리적일 듯싶어서 하루를 지켜보려고 했다.
준비물은 칫솔 같은 생활도구와 9일간 사용할 의복에는 이름을 부착해야 하고 드시는 약이며 여러 가지 준비물이 필요하다. 게다가 공간이 달라지니 불안해하실까 봐 걱정이 돼서 편지도 써서 주머니에 넣어드리고 별도로 같은 내용을 써서 요양보호사에게도 부탁을 했다. 자꾸 잊어버리고 같은 질문을 하니 글을 보면 덜 물어볼 듯도 해서 준비를 했다.
지나고 보니 차라리 핸드폰도 같이 드리고 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하루에 몇 번이라도 통화를 하면 조금 덜 불안하고 나는 조금 더 안심이 될 수도 있을 듯싶었다.
그때는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나의 인생은 늘 지나고 나서 후회만 남는 것 같다.
나도 누구처럼 묘비명에 '너 그럴 줄 알았다'로 써야 할 듯하다.
하루 밤은 문제없이 지나갔고 비행기는 떴다.
전화로 단기보호센터에 문의를 하면 대체적으로 잘 계신다고 하니 편안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다.
치앙마이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12월 24일 새벽에 서울에 도착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엄마가 비록 성당에 미사를 가시지는 못하지만 크리스마스를 단기보호센터에서 지내시게 하긴 싫었다.
11시경에 센터에 엄마를 모시러 갔다.
엄마는 나를 보는 순간에 " 너 어떻게 알고 나를 찾으러 왔니" 하면서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순간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내가 집에 가려고 했는데....."
"어떻게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 물었더니
"걸어서 가면 되지" 하면서 나를 만난 후의 온전히 안심과 기쁨에 찬 엄마의 얼굴 보였다.
나는 후회했다.
엄마가 늘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여행을 갔을까'
나중에 든 생각이지만 낯선 공간에 모두가 낯선 사람들 속에서 자기 자신이 어찌하여 이곳에 있는지 이해도 잘 안 되는 상황에 있으면서 엄청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 같다. 그래도 그때는 상황을 이야기하면 이해도 하고 다녀오라는 이야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오분도 지나지 않아서 잊어버리긴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 옷 정리를 하다 보니 엄마의 바지 주머니에 내가 써서 넣어둔 편지가 있었다.
그 편지는 접힌 모서리가 다 닳아있었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으면 그렇게 됐을까.
나는 그날 이후로 엄마를 집 이외의 장소에서 주무시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