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어느 늦은 봄날에
MBC 방송작가라는 분이 나의 소셜미디어 두 곳에 글을 남겼다. 기억에 관한 다큐를 제작하려는데 나연이의 이야기를 접하고 혹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냐는 물음이었다.
어... 방송국이라니!!!
사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나연이를 기억하는 전시회나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이런 연락이 오니 겁도 나면서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5월이 끝나가던 어느 날 카페에서 김종우 pd님과 작가님과 처음 만났다.
나연이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도 울었지만 나보다 더 많이 우는 pd님의 모습을 보면서 왠지 이야기를 해도 될 거 같아서 촬영을 수락하게 된다.
사실 그냥 여러 기억의 이야기들 중 하나로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들어가는 거라 생각해서 가볍게 촬영을 시작했던 거 같다.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다며 작은 카메라를 가지고 우리 집에 처음 방문했던 피디님과 작가님.
처음부터 막 매달리며 좋아하던 사번이, 집에 손님이 오면 엄마가 매우 친절해진다는 걸 알고 그 기회를 노려 더 열심히 게임을 하던 일번이, 무조건 낯선 사람은 싫다며 등 돌리던 이번이도 촬영팀의 방문이 잦아지면서 다들 친하게 잘 지냈던 거 같다.
본인이 광고 쪽의 일을 하기에 더더욱 카메라는 피했던 신랑이지만 촬영이 오는 날은 집이 매우 깨끗이 정리되었기에 좋아했다. ㅋㅋ
방송에서는 매우 짧은 분량이 나왔지만 2주에 한두 번은 오셔서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촬영하며 친해진 덕분에 평소 엄마에게는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제작진에게는 말할 수 있었던 거 같다.
특히나 남성 촬영자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사춘기가 시작한 이번이에게 여성팀을 따로 붙여주셔서 언니들과 개인적 연락도 하며 매우 즐겁게 촬영하게 배려해 주신 것들이 좋았던 거 같다.
촬영팀이 오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 pd님 안 오시나며 찾고 유치원에 찾아온 촬영팀에게 ‘우리 pd님’ 오셨다고 자랑하던 사번이때문에 많이 웃었다.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셔서 나연이가 좋아했던 것들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재현해 놓았던 나연이의 천국은 지금 봐도 좀 감탄스럽다.
그렇게 세세하게 살폈던 모든 것들의 결과물이었기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시고 공감했던 거 같다.
방송에 나가기 전에는 솔직히 걱정이 더 컸던 거 같다. 세상에는 나보다 힘든 사연을 갖고 계신 분이 많은데 괜히 욕먹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그런데 방송을 보시고 공감해 주시고 손 잡아 주시고 안아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지금은 오히려 좋다.
그리고 솔직히 vr나연이는 진짜 나연이랑은 너무나 달랐기에 거기에 빠져 더 슬프고 그런 건 없었다. 그럼에도 늘 마음속에 묻어두고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vr나연이에게라도 할 수 있었기에 내 마음의 무거웠던 짐 하나를 좀 가볍게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
처음 pd님을 만났을 때 우리 가족에게 선물 같은 방송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연이가 우리 가족에게 준 선물이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