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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나샘 Jun 03. 2022

정글이 되어버린 무성한 풀숲

30년만에 다시 마주한 너

"제수씨 여기 뱀 나오겠어요~ 허허허"

어느 날 우리 집에  인사차 들른 남편회사 동료가 건넨 말이다. 

텃밭을 구경하고 뒷마당을 둘러보다 무성히 자란 풀덤불을 보며 놀란 듯 넌지시 말했다.


뒷마당은 어느새  거대 풀숲을 이루고 있었다. 감나무를 에워싸다 못해 감나무 키만큼 자랄 기세였다.

 그랬다. 제주 햇살의 따스한 기운은 남달랐다. 3월 초, 여리고 올망졸망했던 풀들은 어느새 키가 딸아이 키만큼 자라나 있었다. 무성하다 못해 정글을 방불케 했다. 텃밭을 가꾸느라 뒷마당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찰나였다.


풀을 베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쉽게 시도가 되지 않았던 터였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어 남편에게 풀 베는 도구 '낫'을 좀 사달라고 부탁을 했다. 며칠 후 퇴근길에 낫을 구입해왔더랬다.



하... 얼마 만에 잡아보는 낫인가? 어림잡아 30년 만에 잡아보는 데도 이 친근함은 뭐지?

낫이란 이 도구가 낯설지 않았다.

하얀 목장갑을 끼고 조심스레 낫을 잡았다.  잡초풀이란 녀석을 다 베어버리겠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성인 허리까지 자란 풀을 부여잡고 베기를 시작했다. 얽히고설켜 뒤엉킨 풀숲의 진한 풀내음이  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립고  또 그리운  고향의 향기였다.


풀을 부여잡고 베는 순간, 낫의 날카로운 날에 풀이 잘라져 나갔다. 낫 손잡이의 그립감이  착 감겨  부드러웠다.

질긴 풀의 줄기가 싹둑싹둑 스무스하게 잘도 잘려나갔다. 혹여라도 진짜 뱀이 출몰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조심스레 작업을 이어갔다. 힘들 줄 알았던  작업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녹음이 짙게 베인 풀내음과 함께 뭉텅뭉텅 잘려나가는 풀들을 마주하니 유년시절 둘째 언니와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두메산골 시골 학교의 하교 후 집에 돌아오면 언니와 나는 가방을 마루에 던져놓고 매일 하는 루틴의 일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풀베기"이다. 무엇을 위한 풀베기였을까? 소 물로 주기 위한 풀베기 작업이었다.

시골집은 앞마당 한켠에 소를 키우는 외양간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 두 자매에겐 소에게 줄 먹이(여물)를 책임져야하는 의무가 주어졌다. 학교가  끝나면 동네 친구들과 정자에서 맘껏 뛰어놀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이 허락치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고추밭, 논 잡초 뽑기 등 농사일로 그야말로 여념이 없으셨다.


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담고 투덜투덜 대며 낫과 비료 포대를 들고 집을 나선다. 소의 먹이가 될만한 여리고 보드라운 풀을 찾아 풀밭 여기저기를 헤맨다. 온 세상이 짙은 녹음의 싱그러움으로 물들어가던 초여름, 토끼풀을 비롯한 각종 야생풀들로 시골마을은  그야말로 초원을 이룬다.  


순간 풀베기는 망각한 채 언니와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시합을 하기도 하고 토끼풀꽃을 엮어 목걸이, 반지, 화한을 만들어 서로에게 걸어주곤 하였다.

클로버 놀이에 푹 빠져 놀다 순간 해가 뉘엿뉘엿 지는 찰나, 낫을 들고 열심히 풀들을 베기 시작한다. 해가지기 전  비료포대에 풀을 가득 채워야 집에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집중하여 풀을 벤다. 풀을 베다가도 개구리, 뱀을 만나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폴짝폴짝 뛰는 청개구리는 물론 알록달록 주황빛을 띠는 꽃뱀을 비롯하여

도마뱀 등 각종 다양한 뱀을 만나기도 하였다.


스르륵 뱀은 우리 다리사이를 헤집고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으~~ 악 뱀 지나간다!! 조심해! 언니!"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뱀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소리를 냅다 지르며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기 바빴다. 언니와 나는 서로의 놀란 모습을 보며  깔깔깔 함박웃음을 터트리곤 하였다.


어느덧 해가 산자락에  빼꼼히 걸쳤다. 비료포대에 풀이 가득 채워졌다. 내가 먹을 식량처럼 마음이 충만해진다.

가득 찬 비료포대를 들고 터벅터벅 풀 초원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는 마음은 처음 투덜대었던 마음과는 달리 뿌듯함과 성취감으로 피어오른다.



어린 시절 추억에 새록새록 빠져든 동안 어느새 뒷마당 풀들이 다 베어졌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노동으로 인한 땀방울인가? 내 땀방울이 신성스럽기 까지 했다.

무성한 풀들로 자취를 감추었던  감나무 줄기가 선명히 모습을 드러냈다.  반가웠다.

좀 더 일찍 베어줄걸 하는 미안한 마음이 진하게 스몄다. 마당 한켠에는 베어놓은 풀들이 모여 어느새 풀무덤이 되었다.  아이처럼 풀무덤에 폴짝 뛰어오르고픈 마음이 순간 일렁였다. 잡초풀로 무성했던 뒷마당은  환하게 밝은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답답한 마음이 시원해졌다.

덥수룩한 긴머리를  단발로 산뜻하게 자른느낌이랄까?

제주에서 처음 맞이한 뒷마당의 초여름의 색깔은 다양했다. 생경함, 싱그러움, 놀람, 미안함, 뿌듯함으로 다채로운 감정이 내면을 채웠다. 추억이 서려있는 이라는 도구를  통해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여행을 다녀왔다.



다시는 마주 칠일이 없을 줄 알았던 농기구들과  친구가 되어 사이좋게 지낼 줄은 가히 상상하지 못했다. 다시 정글이 되기전,장마가 오기전  이 공간에 자주 눈길을 주며 살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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