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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 Lover Oct 07. 2020

탄광촌에서 태어난 짐승

"나는 개로 남을 것이다." - 다 아는 화가의 잘 모르는 이야기②

     

테오에게

     

아버지나 어머니가 본능적으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덩치가 크고, 털이 많으며,

집 안에 지저분한 발로 드나들 게 분명한 개를 집에 두기 망설이는 것처럼 나를 집에 들이는 걸 꺼려한다. 그래, 그 개는 모든 사람에게 걸리적거리고, 짖는 소리도 아주 큰, 불결한 짐승이다.

.

.

.

나는 그 개의 길을 택했다는 걸 너에게 말해 주고 싶다.

나는 개로 남아있을 것이고,

가난할 것이고,

화가가 될 것이다.  

- 반고흐 영혼의 편지


 고흐는 직업을 여러 번 바꿨다. 미술상, 교사, 도서 판매원, 전도사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화가가 되었다. 이 중 화가가 되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준 직업은 미술상과 전도사였다. 첫 직업인 미술상으로서의 출발은 16살 때였다. 성적이 우수했음에도 1866년 돌연 학업을 중단한 직후였다. 학교를 그만둔 뒤 유럽의 일류 미술상이었던 삼촌의 가게 ‘구필 상회 (Goupil & Cie)’에 취직했다. 성실한 태도로 신뢰를 얻었고 고흐는 능력은 빛이 났다. 20살 때에는 그를 믿고 런던 지사에 파견하기도 했고, 고흐 인생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시기였다. 나중에는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살았지만, 이 시기에는 고흐가 테오를 도와줄 정도였다.


 그림을 거래하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그림을 접할 수 있었고, 그 결과로 고흐는 심미안을 얻었다. 하지만 이 심미안은 오히려 고흐가 이 직업을 그만두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자신의 기준으로 고객이 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추천하게 되면서 잦은 충돌이 생기게 된 것. 그림을 그저 ‘장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이야기하며 구매를 강요하는 설교를 퍼붓기도 했다. 자신이 권하는 그림을 사지 않으면 비난도 서슴지 않았으니, 이 정도면 그림을 파는 ‘화상’(畵商)이 아닌 ‘진상’이었다. 결국 해고 통지와 함께 미술상이라는 첫 번째 직업과 결별했다. 사실,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삼촌도 있었고, 타협하여 버틸 수도 있었으나 고흐는 직업에 흥미를 잃고 있었다. 그맘때 지독한 짝사랑의 열병을 앓다가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사랑도 잃고 직장도 잃은, 방황하는 영혼은

기댈 곳이 필요했다.


 그 후 영국 램스게이트 학교에서 무급 교사, 토머스 슬레이드 존스 목사의 보조목사 겸 조수 교사,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와 삼촌의 추천으로 도서 판매원이 되었다가도 적응하지 못했다. 첫 사랑의 아픔은 너무나 깊었고, 경제적인 안정보다는 심적인 안정이 필요했다. 그래서인지 서적 판매보다 성경을 번역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일에 더 치중했고, 종교인이 되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신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은 라틴어, 그리스어, 대수와 수학 등의 지식을 쌓는 공부였고, 고흐가 생각하는 성직자의 역할과는 거리가 있었다. 고흐는 종교적 메시지를 통해 이루고 싶은 원대한 꿈이 있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고단한 삶 속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구원'해주는 것이었다. 고대어와 수학 따위는 고흐에게 불필요한 지식일 뿐이었다. 이 괴리감 때문에 결국 학업은 포기했지만 복음 전도사 훈련을 받기로 한다. 전도사 훈련을 받는 와중에도 그림에 대한 열정은 이미 그의 가슴 안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도중에 본 여러 가지 것들 중 몇몇을 대강 스케치해 놓고 싶지만, 그 일이 필시 내 진짜 일을 못하게 할 테니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낫겠지.” - 18781115


- 멜리사 맥 킬런 천재 예술가의 신화와 진실 반 고흐중 발췌


이 때까지만 해도 그림이 고흐의 '진짜 일'이 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그림을 향한 마음의 끌림을 억제하며 전도사의 길을 걸어보려 했건만, 3개월의 수습기간이 끝나고도 정식 직무를 위임받지 못했다. 이 때 고흐의 아버지는, 탈 많은 큰 아들이 다른 길로 새지 않고 성직자 집안의 내력을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것 같다. 복음 전도사로서 활동할 수 있는 다른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힘 써주었다. 그렇게 해서 간 곳이 보리나주의 탄광촌이었다. 탄광촌의 광부들의 생활은 생각보다 고되고 처참했다. 고흐는 그 곳에서 성경모임을 주최하고 병자들도 방문하며 전도사 임시직을 얻었지만, 약 7개월 만에 또 다시 해임되었다.

실패는 정말 지독하게도 고흐를 따라다녔다.


 그런데 고흐가 해임된 이유가 다소 특이하다. 광부들에게 자기 옷을 주고 헛간에서 지내며 음식도 거의 먹지 않는 등의 ‘광적인’ 자기희생 때문이었다. 고흐 생각에 설교는, 고된 노동으로 힘겹게 연명하는 광부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고통을 몸소 겪으며 행동으로 도울 때 '참된 신앙'을 느꼈다. 성직자로서의 품위가 가장 중요했을 윗사람들에게, 고흐의 ‘대책 없이’ 순수한 희생은 꽤 충격적이고 거슬렸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흐는 포기하지 않았다.

해임이 되고도 광부들의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해 중재에 나섰다. 폭력 시위를 하려는 광부들을 순화시키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자비를 들여가면서까지 1년을 그렇게 더 버텨보았지만 현실의 한계를 느낄 뿐이었다. 실질적인 다른 무언가로 그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 생각의 답은, 그림이었다.


 1879년 8월 무렵부터, 밤늦도록 그림을 그렸다.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표본’이라 여긴 광부들의 모습을 스케치북에 채워나갔다. 동생 테오와 구필화랑에 모사할 본보기가 될 인쇄물(특히 밀레의 <들판의 노동>)들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렇게 무수히 많은 거장들의 작품과 석고상의 복제물을 따라 그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림 독학’을 이어갔다.


고흐가 독학할 때 참고했던 그림 - 쥘 브르통 <이삭 줍는 사람들의 귀가>, 1859년작
 (왼) 밀레의 씨뿌리는 남자 / (오) 고흐의 씨뿌리는 남자 - 밀레는 고흐에게 있어 멘토였다.
(왼) 밀레의 '낮잠' / (오) 고흐의 '낮잠'  - 밀레의 작품들은 고흐가 화가 초창기 시절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따라 그렸다.


 인생에 필요 없는 경험은 없다고 했던가. 고흐의 인생 첫 직업, 미술상은 많은 그림과 전시회를 접할 수 있는 통로였고, 안목을 키우는 기회였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스케치 애호가로서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다. 여기에 종교에 대한 실망은 그림을 그려야만 하는 분명한 목적을 만들었다.


계속된 실패를 거쳐 마침내,

인생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3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냈다.


무엇을- 화가가 되어

어떻게- 삶을 공감해주는 그림을 그린다

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개 취급을 받을지언정, 가난해질지언정, 고독해질지언정 그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온 탄광촌에서, 마침내 우리의 ‘화가 고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고흐 - 감자먹는 사람들 1885년작_탄광촌 사람들을 모델로 그린 고흐의 초창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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