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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오늘 Nov 18. 2020

시아버지를 보지 않고 살기로 했다.

" 애 하나 낳는 게 그렇게 어렵냐?!!!"

" 애 하나 낳는 게 그렇게 어렵냐?!!!"

" 애가 반갑지. 너는 안 반갑다! "

" 남들은 애 낳고 일 다니고 다 하는데!!! 네가 지금 자격증 공부할 때냐?"

지난 명절, 거나하게 술에 취해 들어오신 시아버지께서 포효하듯 나를 향해하신 말씀이다.

보자 보자... 가만있어보자. 달력이 어디 갔더라아아 지금이 천구백이십 년... 인가 보자 보자 어디 보자.

그렇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의심했다.


물론,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아버님은 결혼하고 반년쯤 지나자 손주 소식이 왜 없는지 물으셨고 자주 잔소리를 하셨다. 결혼하고 2년 동안 신혼을 즐기자고 피임을 했기 때문에... 아버님의 손주 재촉은 상처는커녕, 충분히 흘려들을 수 있는 얘기였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더 잘해드려야지 했었다.

그러나 시험관 시술에 실패했던 달에도 유산을 하고 겨우 정신을 차린 뒤에도 시아버지의 잔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한층 더 강력해졌달까... 왜 진작 시험관 시술을 하지 않았는지... 임신을 하고 나서 크게 놀랬던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너무 누워만 있었던 건 아닌지... 묻고 또 물으셨다.

시아버지를 뵙고 오는 날이면 남편은 잠들 수 없었다. 부부싸움을 한다던가 내가 바가지를 긁어서가 아니라, 으드득으드득 밤새 울리는 내 이갈이 소리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나조차 모르게 밤새 이를 갈고 있었던 모양이다. 남편과 다른 가족들은 원래 좀 그런 분이니... 네가 이해를 해달라고 했다. 아가씨들은 입을 모아 우리 어렸을 땐 더 심했다며 그냥 한 귀로 넘겨버리라고 했다.


'참나... 아버님 말씀이 머리카락도 아니고 한 귀로 넘기긴 뭘 넘겨...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이번 명절에 또 그러시면, 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맨 정신에 이를 갈고 있었는데...

막상, 술에 취해 처음으로 소리까지 지르시는 아버님 앞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는 합죽이가 되고 만 것이다.

나를 향해 누군가 이렇게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고함치며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은 난생처음 겪는 일이라 충격 그 자체였다.

내가 지금 딩크족으로 살겠다 통보를 한 것도 아니고 당신들 모르게 숨겨 둔 자식이 있었다고 고백을 한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아이를 죽인 것도 아닌데..


아무리 좋게 이해를 해보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산을 한 뒤에도 쉬지 않고 시험관 시술을 진행하였고 아이를 갖기 위해 안 해 본 노력이 없는 나인데... 세상 아주 큰 범죄를 저지르려다 걸린 것 마냥 이렇게까지 혼나야 하는 이유를 이 가족들 중에 누가 나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문득, 친정 식구 생각이 났다.

아이를 유산하던 날 내 옆에서 소리 없이 울던 엄마의 눈물이... 말 한마디 없이 나를 꼭 안아주던 친정 아빠의 포옹이... 가장 중요한 건 네 마음이니 마음 잘 챙기라던 친오빠의 위로가...

링 위에서 다 쓰러져 가던 선수가 사랑하는 가족을 보고 갑자기 에너지가 샘솟아 앞 선수에게 강력 펀치를 날리는 것처럼 (물론, 시아버지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되지만) 친정식구 얼굴이 떠오르며 이대로 듣고만 있을 수 없다 싶어 진 나는 그제야 " 아버님! " 하고 반격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만 좀 해요!!! 이제 다시는 여기 안 와! 이제는 아빠 안 보고 살 거라고!!!"

시아버지 말씀이라면 늘 묵묵히 듣고 있던 남편이 나를 대신해서 마음의 소리를 외치고 있었다.

"얘도 귀한 집 자식이야. 함부로 소리 지르지 마세요!!!"

남편은 그대로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를 안아주며 하염없이 사과했다.

"미안해. 앞으로 여기 오는 일 없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사과하는 남편 손을 잡고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터트렸다. 이 모든 일이 정말로 나 때문인 것만 같아서 슬펐다.

당당히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내가 너무 처량하고 서글퍼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병원에서 남편 정자가 건강하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 이 모든 일은 나만의 문제가 된 기분이었고 그 뒤로 나는 습관처럼 남편에게 사과를 하곤 했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남편만 보면 미안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난임이 마치 죄명처럼 느껴지던 날도 있었다. 명절을 앞두고, 시부모님 생신을 앞두고, 제사를 앞두고, 나는 매번 조급했었다. 이번 달에는 꼭 성공을 해야 해. 그래야 아버님 잔소리에서 벗어 날 수 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임신이 아이를 만나는 길이 아닌, 아버님 잔소리에서 벗어나는 길 쯤으로 생각하고 지냈던 건 아닌가 싶다.


시댁 식구들이 인정해 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버님과 진심으로 잘 지내고 싶었다.

친절하고 상냥한 내 남편의 하나뿐인 아버지고, 내 아이의 할아버지가 되실 분이니까.

한때는 가끔 전화도 드리고 카톡으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드리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아버님은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말씀하셨다.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이런 게 아니다. 아이 없이 둘이 산다는 건 힘든 일이니 임신에 힘쓰라고 당부하셨다.

그렇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런 것이 아니다. 시아버지 눈치를 보고 벌벌 떨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새 친구를 원한다. 나와 남편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귀여운 꼬마 새 친구를...

새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평화가 중요한 법이지.

상처 없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엄마가 되어 꼬마 새 친구를 만나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시아버지를 보지 않고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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