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기퍼의 불안

by 용팔

나는 손홍민만큼 축구는 못해도 손홍민만큼은 좋아한다. 소싯적 신동 소리까지는 아니어도 공 좀 찬다는 칭찬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 축구 선수로서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경기를 빼먹지 않고 보는 것으로. 축구만큼 역동적이고 가슴 조이며 볼 수 있는 스포츠도 흔치 않다. 22명의 터프한 남성미를 뿜어내는 선수들의 열기와 광적인 관중들의 함성, 네트가 출렁이는 극적인 골인 순간의 절정에는 다른 종목에선 맛볼 수 없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축구에서 가장 힘든 포지션은 지옥과 천당을 수시로 오가는 골키퍼가 아닐까 싶다. 경기 내내 개고생해서 골을 잘 막아봐야 본전이고, 까닥하다 실점이라도 하면 곧바로 쳐 죽여도 모자랄 역적이 돼버린다. 비슷한 일이 집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가끔 혼자 집을 보곤 있는데, 깜빡하고 아내가 시킨 일을 못 하거나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핀잔을 들어 먹기 일쑤다. 내 집 하나 지키는 일도 힘든데, 죽느냐 사느냐의 피 말리는 실전의 문지기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가정이든, 골대든 못 해먹을 노릇이 집 지키는 일이다. 물론 골을 먹더라도 신들린 선방으로 까먹은 본전을 되찾아 오는 선수들도 있다. 골키퍼의 활약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는, 궁극의 대결이 벌어지는 페널티킥(또는 승부차기)에서.

11m는 인간이 심리적으로 가장 공포심을 갖는다는 높이다. 페널티킥은 이 거리를 두고 이뤄지는 승부다 보니 그 상황의 긴장감이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박빙의 경기에서 나오는 페널티킥은 관중들조차 맨정신으로 보기가 아찔한데, 직접 맞닥뜨리는 키커(kicker)와 골키퍼의 심리적 중압감은 영혼이 열 번쯤 들락날락한 상황으로 전개된다. 보이지 않는 멘털의 강약이 갈리는 순간이다. 이론적으로는 페널티킥을 막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키커가 찬 공이 골대에 도달하는 시간은 대략 0.4~0.5초로 골키퍼 반응 시간인 0.6초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키커보다는 골키퍼가 느끼는 부담감이 더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위기를 골키퍼들은 그들만의 마인드 컨트롤로 이겨낸다. 브라질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와 코스타리카 8강전 승부차기 때 네덜란드 골키퍼 팀크룰은 상대편 키커한테 가서 “나는 네가 어느 방향으로 볼을 차는지 알고 있다”라는 기 싸움과 자기 암시로 2골을 막아냈다. 독일의 전설적인 골키퍼였던 제프 마이어는 평소 유머러스한 생활로 유명하다. 골키퍼라는 또 다른 정체성이 갖는 극도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위한 선택이었다.


『관객모독』의 극작가 피터 한트케 작품 중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라는 심오하고 묘한 제목의 책이 있다. 소설 끝부분에 축구 경기를 보러 온 주인공이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 심리에 대해 옆 사람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골키퍼는 저쪽 선수가 어느 쪽으로 찰 것인지 숙고하지요. 그가 키커를 잘 안다면 어느 방향을 택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죠. 그러나 페널티킥을 차는 선수도 골키퍼 생각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골키퍼는,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공이 오리라고 다시 생각합니다. 그러나 키커도 골키퍼와 똑같이 생각해서 원래 방향대로 차야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겠죠? 이어 계속해서, 또 계속해서....”

그렇게 서로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다가 키커는 공을 차 버린다. 어느 방향으로 공을 차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긴장 속에서 찼는데, 아뿔싸! 그냥 한 가운데다 내질러버린 것이다. 더 당황한 건 골키퍼다. 골키퍼 역시 어느 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그냥 중앙에 가만히 서 있다가 얼떨결에 킥을 막았다. 결국 누구도 쉽게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어이없는 결과를 마주하고 만다.



“엄마 또 시작이다.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다 오더니, 속이 어디가 잘못된 게 아닌가 불안해하신다. 니가 전화해 안심시켜 드려라.”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미국 누나의 문자였다. 평소에도 걱정과 불안을 달고 다니는 분인데, 아픈 증상에는 더 민감해한다.

"정말 어디 편찮으신 건지 모르잖아. 정밀검사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냐?” 걱정돼 묻자,

“의사가 괜찮다고 했다니까. 노인네들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데, 너까지 왜 그러냐? 아주 모자가 세트로 나를 괴롭혀요.” 모전자전인지 내가 안고 있는 불안도 그 못지않다는 거다.


축구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사실 제대로 본 적이 드물다. 지난 월드컵 경기 때도 상대 선수가 찬 공이 우리 골대에 처음 맞았을 때 뒤로 넘어갈 뻔했고, 두 번째 맞았을 때는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 바로 TV를 껐다. 불안해서 끝까지 봤다간 사건·사고 소식으로 내가 TV뉴스에 등장할 것 같았다. 심장도 안 좋으면서 왜 꾸역꾸역 보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아내가 한마디 한다. 2년 전 수술 후 심장은 늘 정상과 비정상을 넘나들며 달린다. 덩달아 불안도 점멸등처럼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한다. 심장이 두근거려 불안한 건지, 불안해서 심장이 더 두근거리는지 알 수 없지만, 신경이 곤두서고 감각이 첨예해진다. 아내 역시 그런 남편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본다. 끊이지 않는 걱정으로 생기는 부부의 불안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오늘을 살아가며 불안을 느끼는 우리 삶의 모습이 페널티킥을 맞이하는 골키퍼의 심리 상태와 어딘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뉴스에 50~60대 불안장애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걱정하는 일의 90%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체로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사소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차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일은 두려움이나 불안의 크기를 모르는 것이니.

알랭 드 보통은 책 『불안』에서 불안의 이유를 사랑 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기대와 불확실성으로 생기는 불안에 공감한다. 인간에게는 추구하는 가치가 있고 목표가 있다. 세속적으로 표현한다면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기대와 실현의 불확실성으로 불안해한다. 현대인의 불안은 그런 성취욕에서 오는 심리적 병리 현상이다. 모 개그맨이 앓았다는 공황장애도 불안장애의 일종이라고 하는데, 경쟁하는 사회의 영향과 무관치 않다는 거다. 내게도 욕망이 있기에 불안을 벗어버리지 못한다. 결국 불안장애 환자들 증가에 나도 한몫하고 있는 셈이다.


페널티킥을 맞이하는 골키퍼의 마인드 컨트롤처럼 내가 불안을 잠재우는, 믿는 구석이란 종교에의 의지이다. 다만 순도 100% 믿음이 아닌 터라 불안의 본질을 해결해 주지는 못 한다. 기도발이 잘 먹히지 않는다는 얘기다. 불안의 골이 깊어지면 곧잘 상실감으로 찾아오곤 한다. 때론 그 불안은 영혼마저 갉아먹는다. 자신들의 영혼을 잠식당하는 60대 미망인과 젊은 외국인 노동자 사이가 불안으로 파괴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랑해요”

“그런데 왜 울죠?”

“너무 행복해서 ... 두려워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말이 있죠 .... 두려워 말아요.”

불안이 일상이 되다 보니 행복조차 불안하다. 우리 뇌는 기쁨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위험과 잃음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긍정적인 변화에도 부정적인 반응이 뒤따라온다는 것이다. 어떻게도 불안은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이런 경우 대개 전문가의 처방이 뒤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나는 정신과 의사도 아니어서 어떤 해결책도 갖고 있지 않다. 지극히 원초적인 방법만 써먹을 뿐이다. 맞서 싸우거나 순응하거나. 불안은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일 테니까.


‘골키퍼는 공이 라인 위로 굴러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의 첫 문장은 골인이 되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골키퍼의 영원 같았던 불안은 끝나지만, 그 손을 떠난 공은 골라인을 넘어가고 있다. 공은 예측했던 방향과는 반대의 네트에 꽂혔고, 순간 상대 선수들과 관중의 환호 소리가 허탈함에 주저앉은 골키퍼를 짓누른다. 대학 시절 골키퍼였던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공은 내가 원하는 대로 오지 않는 법이다.

어쩌겠는가. 사는 일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