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차로 단양역에 닿았다.
아침 햇살의 부지런함이 날마다 더해가는 이유도 있었으나 초행길이라 서둘러 몸을 일으킨 덕분이었다. 최종 목적지가 남아있어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단양 터미널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 속의 가벼운 긴장감은 코로나가 몰고 온 분위기와 무관치 않은 듯했다.
목적지로 가는 버스를 제시간에 탄다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시골 버스들이 그렇듯 배차 간격이 너무 길뿐더러 도심의 정류장처럼 떡하니 목적지 앞까지 실어다 줄 리도 만무했다.
"거기 가실려면...OOO 마을에 내리셔셔 XXX를 지나 한참 걸으셔야 할텐데요. 택시타고 들어가시는게 빠르고 편할 겁니다." 보통 지리를 물으면 나오는 시골버스기사의 가이드 지침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발품으로 해결할 노릇도 아니었다. 두어 마장이라면 가볍게 다닐 수 있겠지만 하루 일정의 나들이라 저뭇하기 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 몇십리가 넘는 거리를 운에 맡기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중간 어디 쯤에서 내릴 요량에 목적지 방향으로 바로 출발하는 아무 버스에 올랐다.
태양 빛이 구름 속으로 사라지자 우울한 그림자가 사위를 거두었다 다시 빛 속으로 풀려났다. 민낯의 땅에도 덩달아 희비가 갈마들었다.
연두가 가장 빛이 나는 시기다.
유충에서 껍질을 벗고 성충으로 진화하듯 초록이란 성충으로 우화하기 전 애벌레의 연두는 격한 봄바람에 가냘프게 요동쳤다.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치맛자락을 다독이고 나들이를 즐기는 시골 처녀들과 밭일에 여념이 없는 아낙네들의 흙먼지 날리는 고쟁이 바지가 묘한 대조를 이루는 마을 풍경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차로 옆길을 따라 흐르는 시냇물을 보니 당장 차에서 내려 탁족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도 일어났으나 아직은 시린 봄에 마음을 거둬들였다.
버스 안은 고요했다. 마스크로 얼굴을 동요 멘 동네 어르신들은 차창 밖의 따듯한 햇살에 기대어 있을 뿐 타고 내릴 때의 짧은 안부 인사 외는 전혀 말을 섞지 않았다. 이런 시골을 오가는 버스에서 으레 들을 수 있었던 전원일기식 대화는 오래전에 끊긴 것 같았다. 이 또한 코로나가 가져온 익숙하지 않은 정서이니라.
차창으로 흘러가는 봄 풍경을 한창 즐길 무렵 <새한서점>의 이정표가 훅 지나가 버린다.
급하게 기사를 불러 차를 세운다.
이정표는 도착이 아닌 또다시 출발이다. 목적지의 기대를 안고 가는.
마을 초입, 춘풍이 지나간 대지에는 흙의 향기와 생동하는 햇빛이 감돌았다. 자드락길로 들어서자 숨 차오름을 느끼는가 싶더니 가벼운 현기증이 일어났다.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에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길을 오른다.
숲길을 걷는 듯하다가 곧이어 나타난 작은 건물의 통로를 따라 반대편으로 나오자 기울어진 넓은 평지에 세워져 있는 단층 건물이 나타났다. 허물어 내릴 듯 위태로운 판잣집인데 오히려 안정적인 구도를 주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비탈에 선 책방은 자연에 안긴 것이 아니라 품고 있는 듯 했다.
중고책방 새한서점은 그렇게 비탈져 누워 있었다.
한참을 건물주위를 둘러보며 머뭇거린다.
하늘색 슬래브 지붕 위에서 튕겨 나간 햇살이 눈 속으로 들어와 부서졌다.
어스레한 서점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책 냄새와 함께 토향이 진한 커피 향처럼 올라왔다. 어마어마한 책의 규모에 잠시 어지러운 눈으로 서고 사이를 오간다. 책들의 미로를 걷고 있는 듯하다. 책들은 바지런히 제 위치에서 견디고 있었으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책들는 층층이 개어 올라 어느 암자 앞에 쌓은 석탑처럼 위태로웠지만, 땅에 심을 박고 서있는 기둥처럼 서점을 지탱하고 있었다.
"서점에서는 책의 표지, 두께, 종이의 지질, 활자의 모양, 판형 등 구체적인 책의 거의 관능적인 볼륨을 직접 접촉할 수 있어서 좋다."
작가 김화영은 말했지만, 이곳의 책들은 관능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고, 낡은 종이 위의 글자들은 노인의 잔주름에 핀 검버섯처럼 다닥다닥 붙어 하나의 의미가 아닌 활자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 책이나 한 권 빼서 책장을 넘기자 덮고 있던 묵은 먼지들이 파편으로 날아오르고 그 먼지에 벗겨진 글들이 선명하게 눈에 찍혔다. 1990년 2월 초판 인쇄. 둘째 녀석이 태어난 해 이 책도 어느 작가의 손끝에서 잉태되어 세상에 나온 후 어떻게 흘러 이 어둠과 먼지에 예민하게 길들어져 남게 됐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오랜 시간을 지고 떠돌았을... 그리고 이곳에 갇혀 있을 뿐이다.
내가 서 있는 이 순간조차도 곧 분해되어 그 쌓인 시간 위에 또 묻히겠지만.
책들은 서로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책에도 운명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쓰일 운명을 말하는 것일까 이렇게 머물러 있어야 함을 받아드리라는 얘기일까?
내게 선택되어 이곳을 떠나 동행할 책들이 과연 나와 인연이 있을까?
이곳의 책들은 정지되고 쌓인 시간에 묻혀 영겁의 세월 속에서 땅과 일체가 된 화석처럼, 그래서 책이라는 개별성으로서의 존재감은 상실되고 새한서점이라는 공간과 하나의 전체성을 이루는 실체로 남았다. 어느 한 권의 책이라도 떠나면 무너져 내리고 마는...
“책이란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히 기능하고 있다. 대부분의 책은 자신의 긴 생애를 책꽂이에서 보내고 그것으로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의연하다“
작가 김영하의 말처럼 저들의 운명이 이곳에서 존재함으로 얼마든지 완전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 때문일까? 서슴지 않고 선택했을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나 구하기 힘든 희귀본을 마주해도 선 듯 손이 가지 않았다. 내가 그 파괴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이유였다. 결국 운명이 정해진 책들을 포기하고 저쪽 한켠 서점 굿즈와 함께 가지런히 진열된 이제 막 책으로서의 운명을 짊어진 신간 서적 중 한 권을 집어 이 먼 곳 까지 달려 온 흔적을 남기기로 타협한다.
다시 서점 밖으로 나와 들마루(영화 ‘내부자들’에서 이병헌과 조승우가 삼겹살을 구워먹던 장소)에 걸터앉았다.
교졸의 미학. 책방 밖의 망설임과 안의 달콤함
동양 미학의 범주 열 가지 중 세 번째는 교졸(巧捽)*이다. ‘교묘하고 졸렬하다’이고, 한편으로는 ‘익숙함’과 ‘서투름’이다. 미학에서는 아름다움의 두 느낌인 ‘망설임’과 ‘달콤함’을 뜻한다. 뚫어지게 쳐다보지만 또한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한다.
새한서점이 그랬다.
천연의 소박한 아름다움에 인공의 수식이 가해진 멋스러움이다.
산속 서점이라는 낭만적인 이미지로 그려지는 모습을 기대한다면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으나 서점이라는 본업에 충실한 투박한 미와 무엇보다 자연을 바라보는, 아니 품은 듯 시간을 덧댄 자태를 보는 기쁨이 부족하지 않다. 들마루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독서삼매에 이를 수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숲 속에 흐르는 글 물을 마시고 싶다면 한나절 이라도 호사이리라.
기우는 햇살의 설핏한 한 점이 마지막 따듯함을 정수리에 꽂으며 사라진다.
돌아갈 시간이다.
몸을 일으키자 지쳐버린 몸이 무거워지고 그 육신만큼 이 깊은 이야기의 숲이 주는 감정들 또한 무더기로 쏟아져 내린다. 그 감정들은 사색의 여행길에 스며들며 오던 길을 재촉하는 발길을 따라나선다.
참조)
*교졸 : <아이콘과 코드> 임태승. 미술문화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