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다가스카르섬에 사는 헤미헤라토이데스 히에로글리피아라는 나방은 놀라운 습성을 지니고 있다. 이 나방은 잠자는 새의 눈물을 마시며 살아간다.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신비로운 곤충이다. 다른 이의 눈물을 거둬 가 스스로 슬픔 덩어리가 된다니. 얼마나 낭만적이고 오묘한 생명체인가.
요즘 들어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나이 탓일 수 있겠으나 눈물의 질이 예사롭지 않다.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아리아 〈남몰래 흐르는 눈물〉처럼 서정적이고 밀도 있는 눈물이라면 폼이라도 나겠지만,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 경박스럽기까지 하니 문제라는 거다. 드라마만 봤다 하면 온몸의 물기를 다 빼 버릴 정도로 눈물 흘리는 아내를 보고 한심스러워했는데 요즘 내가 그 짝이 났다. 고작 신파조 줄거리에 감정이 팔려 새는 눈물이라니. 애잔한 음악을 듣거나 조금만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앞이 흐려지기 일쑤다. 아내와 같이 TV를 보다 둘이서 눈물 닦은 티슈로 쓰레기통을 채우기도 한다. 한번은 나보다 먼저 훌쩍이는 아내를 보고 괜히 한소리 타박하려는데, 나도 억지로 눈물을 참다 보니 목이 멘 소리가 나왔다. 인위적인 감정 조절이 일으키는 내적 부작용이다. 이럴 땐 화장실이라도 가는 척 슬그머니 일어나면서 잽싸게 촉촉해진 눈가를 닦아 위기(?)를 모면한다. 감정의 중력에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눈물을 소비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에서는 사랑 잃은 남자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이런 독백으로 추스른다. “실연당한 후 달리기를 시작했다. 한참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땀이 흐른다. 수분이 다 빠져나가 버리면 눈물이 나오지 않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눈물 나는 얘기다. 표현할 수 없는 비애감이 몰려올 때, 몸은 대책 없이 반응하며 수분을 쏟아 낸다. 눈물샘이 고장 났다거나 정서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다. 내 증상을 본 아내는 갱년기라고 진단했다. 나이가 들면 남성들에게는 아담 증후군이 생긴다고 한다. 남성 호르몬이 줄면서 상대적으로 여성 호르몬 분비율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눈물이 자주 나고, 센티sentimental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소싯적 즐겨 보던 외화 「육백만 불의 사나이」의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그 에피소드에는 자기 몸을 뇌로 컨트롤하여 자가 치유 능력을 발휘하는 악당이 등장한다. 총에 맞아 피를 흘리게 된 위급한 상황에서 그의 뇌가 신체 각 기관에 명령을 내려 스스로 피를 멈추고 치료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능력이 나한테 있다면 쓸데없이 흘리는 눈물을 멈추게 하고 싶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눈물이 눈물샘에서 지금 막 분비되기 시작했다면, 안구 표면을 적시기 전에 건조시켜 증발하게 한다. 제어가 늦어 할 수 없이 눈물을 흘려야 한다면, 하품 후 나오는 눈물인 양 나트륨을 제거한 맹물로 만들어 내보낸다.’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같지만, 실현 가능하다면 남자 체면은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사나이는 눈물 흘리지 않는 법이라는 지극히 마초적인 가르침을 받고 자라 온 터라 남자들의 눈물은 늘 소리를 내지 못하고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공중화장실에는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건 눈물만이 아니죠.’라는, 친절하게 자존심을 구기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대체 남자들의 수분은 어떻게 처리하라는 걸까.) 슬픔에 반응하면서도 눈물을 분출하지 못하는 대신 죄 없는 가슴의 통점만 사정없이 내리치다 보니 사리처럼 굳어진 응어리가 생겼다. 그렇게 쌓인 스트레스 탓일까. 남자가 여자보다 평균 수명이 짧은 이유 중 한 가지가 덜 울기 때문이라고 한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면 몸 안 장기가 대신 운단다. 한 기관이 제구실하지 못하면 다른 기관들도 영향을 받게 되고, 질병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는 거다.
나이가 들면서 퇴색하는 감정들이 생기고, 그 자리를 다른 감정들이 대신하게 된다. 감정은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에 자제할 수는 있지만, 무심하게 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어떤 감정을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느냐는 살아오면서 소진한 감정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들이 흘리지 못한 눈물은 몸 안에 저장돼 있고, 더는 감당할 수 없게 될 때 기어이 비어져 나와 옷깃에 스며든다. 그냥 눈물이라기보다 몇 겹이 쌓여 데워진 생의 경련이기에 사내들 눈물이 뜨겁다고 하는 것이다.
눈물 문제를 떠나서 생각해 봐도 갈수록 감정 이입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진다. 이성적 판단보다는 감성적 반응이 먼저 치고 들어올 때가 많다. 이성이라는 큰 바위에 눌려 있기보다는 감성이라는 조약돌을 튕겨 가며 살아야 가슴이 덜 아프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 본다. 감정은 삶이 내는 소리이고, 가슴속 요동치는 옹이를 받아 내는 수단이다. 그 울림으로 고통을 내뱉고 상처를 치유한다. 어떤 감정이든 삼키지 않고 오롯이 드러내야 살맛이라도 나지 않을까. 질퍽거리거나 지질한 감정 분출이 아니라면, 절제하기보다는 감정에 충실한 태도가 건조한 삶의 힐링 역할을 하리라 믿는다.
사실 헤미헤라토이데스 히에로글리피아는 불가사의한 곤충이 아니다. 실상을 알게 되면 그 신비감은 무참히 깨지고 오히려 섬뜩하게 다가온다. 새의 눈을 공격해 눈물 성분에서 염분과 단백질 같은 영양분을 얻는 생존 방식을 택했을 뿐이다. 이 곤충은 새의 슬픔을 가져가는 게 아니라 가로채는지도 모른다. 고통을 정화하려는 눈물조차 자기 양식으로 삼는 잔인한 벌레에 불과하다. 누가 흘린 눈물이 다른 누군가에게 웃음이 되는, 어딘지 사악한 이 세상 모습과 닮았다.
눈물은 감정에 따라 맛이 다르다고 한다. 화가 나서 흘리는 눈물은 수분량이 적고 나트륨 함량이 높아 짠맛이 난단다. 슬퍼서 흘리는 눈물은 산성 성분이 높아서 신맛이 나고, 정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다른 감정의 눈물보다 단백질 농도가 20% 진하다고 하니 들여다볼수록 놀라운 인체의 신비다. 나는 태어나는 순간 그 의미를 간직한 채 소리 없이 떨어지는 눈물의 미학을 사랑한다. “점점 죽어 가는 몸, (…) 불확실한 삶에서 어쩌면 눈물은 필수다.”(홍승은,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p.296)라는 말처럼 대체로 눈물은 슬픔이나 아픔과 연결된다. 겪은 상처만큼 성숙해져 가기는 하지만, 아무는 시간을 견뎌야 하기에 애초부터 슬픔이란 썩 훌륭한 감정이 아니다. 이왕 흘릴 눈물이라면 교감 신경을 자극하면서 수분도 많고 포도당이 많아 단맛이 난다는 행복한 눈물이 낫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