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트러진 침대

by 용팔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아주 오래전, 이유 없는 반항과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왠지 폼 나 보였던 10대 시절이었다. 학문적 열정은 담벼락으로 쌓아 둔 채 세속적인 유혹만 쫓아다녔다. 욕망의 원시성이 꿈틀거렸다. 아, 뭔가 거창한 스토리를 꺼내려는 게 아니다. 끓어오르는 사춘기의 순수한 영혼은 성(性)적인 호기심으로 채워졌단 얘기다. 빨간책이라는 출처 불분명의 조악한 성인 만화책을 구하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어렵게 손에 넣은 책은 읽기가 무섭게 나보다 더 굶주린 친구 녀석들의 손을 거치면서 찢기고 너덜너덜해진 채 되돌아왔다. 몇 장 안 남은 책을 조심스럽게 가방 안 깊숙이 끼워놓고, 열공에 지친 모범생의 모습으로 귀가하곤 했다. 가족들이 잠든 밤이면 가라앉았던 낮의 욕망이 다시 꿈틀거려 마치 신선한 피를 갈구하는 드라큘라처럼 빨간책에 빠져들었으니 '그렇게 공부하면 서울대 가겠다'라는 잠언과 같은 말씀을 나는 원초적 본능에다 쏟아붓고 있었던 거다. 마치 나의 밤은 낮보다 아름다웠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음험한 쾌락에 눈을 밝혔다.


자정을 넘어 한창 두 눈에 불을 켜고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보던 만화책을 잽싸게 책상 서랍에 집어넣고 교과서를 들었다. “공부 적당히 하고 자거라. 몸 축난다.” 아버지가 변소에 가려다 내 방에 불이 켜진 걸 보고 한마디 하신 거다. “네, 잘게요.” 나는 피곤한 목소리로 나오지도 않는 하품 소리를 내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어쨌든 내 몸이 축나고 있는 건 맞았으니까.


'헉! 아니 어떻게 이런 책이 우리 집에....'

그런 10대의 성을 쫓던 어느 날, 우연히 집 책장에 꽂혀있는 그 책을 발견하곤 놀라움과 흥분에 휩싸였다. 자식들에게 항상 흐트러짐 없고, 곧은 모습만 보여준 어른의 표본인 아버지가 이런 책을 읽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면서 충격이라고 괜히 발끈했다. 한편으론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를 일상의 작은 일탈로 다스리고 싶었을 만큼 힘들었을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니 찡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는...지, 어쨌는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그저 야릇한 제목에 걸맞은 책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뿐 아니었을까. 후끈 달아오른 머리로 온갖 상상력을 쏟아내며 침을 삼켰다. 빨간책을 넘길 때마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림에 식상에 있던 터라 글이라는 열쇠로 육체의 문을 연다는 건 또 다른 신세계를 안겨줄 것만 같았다. 앞부분은 대충 읽으면서 책장을 넘겼다. ‘키스’, ‘포옹’, ‘침실’ 같은 특정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들을 열심히 찾아가며 속도를 높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면서 실망감이 몰려왔다. 책 어디에도 내가 원하는 장면이 나오질 않았다. 분명 제목대로 전개되어야 했는데.... 격렬한 사랑을 나눈 남녀가 난장판이 된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이 글로 살아나 내 눈앞에서 꿈틀거려야 맞는 얘기였다. 책장은 빠르게 넘어갔지만, 등장인물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야 이거? 왜 이리 시시해. 제목이 순 뻥이잖아.'

처음부터 내용에는 관심이 없었던 터라 대충 읽다 만 책은 흐트러진 이불 위로 무참하게 던져졌다. 그렇게 그 책은 한동안 내 머릿속에 채워지지 않은 관음적 공간을 남겨 놓았다. 훗날 세계문학전집 속에서 다시 그 책을 발견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며 자유주의를 대변한 이 명언의 당사자가 책 저자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탐독해야 할 작품을 19금적 망상으로 읽었다는 자신에 쓴웃음을 질 수밖에 없었다. 그 책은 프랑스 최고 여류 지성인 프랑수와즈 사강의 『흐트러진 침대』였다.


“그림에 구멍 나겠다. 너무 노골적으로 보는 거 아냐?”

“어? 어....어” 아내의 핀잔에도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무튼 남자들이란. 쯧쯧....” 아내는 다른 작품으로 발길을 옮겼지만, 나는 여전히 그 그림을 넋 나간 듯 바라봤다. 전율이 느껴졌다. 아득한 과거의 잊고 있었던 욕망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얼마 전 에드워드 호퍼 전시회를 갔다가 「햇빛 속의 여인」이라는 작품을 앞에 두고서였다. 벌거벗은 몸을 빛으로 감싼 채 창문을 응시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아내는 내가 이 나신의 여인을 보고 음흉한 상상이라도 하는 저질인 남편으로 알았던 모양인데.... 반은 틀렸다). ‘현대인 삶의 단면을 무심하고 무표정한 방식으로 포착함으로써....’라며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작품 평 또한 어떤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오직 내 관심사는 방금 여인이 뒹굴었을 한쪽에 놓여있는 흐트러진 침대에 쏠렸다. 침대를 보자마자 몇십 년 전 기억을 거슬러 그 은밀한 공간을 다시 불러냈다. 근데 왜 저러고 서 있는 거지? 남자는 어딨어? 남자를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떠난 남자를 생각하는 걸까? 정사 전일까 후일까? 그렇게 명화 앞에서도 나는 예술적 감성이 아닌 빨간책을 보던 안목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사춘기의 아슬아슬한 상상력은 중년을 지나서도 아무 때나 끼어든다. 타오르던 불길이 점점 사그라지면서 이제 잔불을 정리하는 시간이 다가왔는데도 샘솟는 불량한 호기심은 교양이나 품격과는 거리가 멀다. 딴엔 아직 죽지 않은 혈기라고 자위하지만, 아내는 이걸 주책이라고 했다. 철딱서니가 없다고, 나잇값 좀 하라고 면박을 주기 일쑤다. 마치 어릴 적 장난감 쌓기 놀이로 상상하는 것은 무엇이든 척척 만들어내는 대견한 아들을 보면서 틀림없이 훌륭한 건축가가 될 거라고 부모는 기대하지만, 커서도 오로지 장난감 쌓기 놀이에만 몰두하고 있는, 지적 성장이 멈춘 한심한 어른이 된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마음의 안정을 찾고 정화돼서 영적인 충만함으로 가득해야 할 예배에 가서도 은혜를 받는 게 아니라 회개만 하다 오는 게 아닌가 싶다.


하늘의 뜻을 알고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하라는 지천명의 나이도 넘겼다. 몸과 머리가 서로 사이좋게 삭아가는 쇠퇴기가 시작됐지만, 그렇다고 벌써 삶이 버석거릴 만큼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60대라는 나이가 참 애매하긴 하다. 중년과 노년 사이에 끼여 장년이라 불리는데, ‘한창 기운이 왕성하고 활발한 나이도 아니고 오래 산 것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세대’란 의미다. 어‘중간’한 세대라는 걸 에둘러 표현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현장에서 물러나야 할 때도 됐지만 100세를 사는 시대다 보니 은퇴도 마음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밖에서는 건강, 노후 대책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마르고 닳도록 들으며 살고, 집에서는 쉬면서 살아온 날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집 안 정리를 깨끗이 해놔야 아내한테 제대로 대접받는다. 인생의 반 이상을 안팎으로 헌신하며 살아왔으니 빛나는 졸업장을 받아도 모자랄 판인데, 어정쩡한 나이 탓에 60대로 대우받는 게 아니라 60대로 취급당한다. 뭔가 손해 본 것 같아서 이대로 주저앉기엔 억울하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지천명의 나이가 지났다는 걸 뒤집어보면 하늘의 명을 따를 나이가 지났으니 이제는 알아서 하라는, 눈치 보며 살지 말라는 게 아닐까. 인생의 반 이상을 세파에 휘둘려 살다 내면의 동력이 서서히 멈춰가는 시기가 왔으니 이제 뭔가 새롭고 파격적인 변신을 해도 눈감아주겠다고 말이다. 내친김에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이란 가끔 유혹에 귀를 내주어도 괜찮다는 나이일 거라는 면피성 해석까지 해 본다. 어떻게든 늙지만 어떤 식으로 늙어갈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품위 있게 살라느니, 나잇값 좀 하라느니 하는 잔소리는 장년을 사는 남자들에게 너무 가혹한 요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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