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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팔 Apr 11. 2021

무너진 가족이 살아가는 방식, 또 다른 가족으로.

영화  <맨체스터 바이더 씨>   스포일러 있음.

한 순간 자신의 실수로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살아가는 아버지에게 찢어지는 고통이란 진부한 표현조차도 사치스럽다. 이혼이란 예정된 이별은 용서할 수 없는 남편에 대한 심판이기보다는 남이었던 서로를 가족이라는 인연의 틀로 지탱해 주던 중심(아이들)의 부재로 자연스럽게 허물어져가는 필연의 과정이자, 그 안에 흘렸을 무수한 감정의 편린들을 주어 담기가 너무 버거워 어쩔 수 없이 놓아버린 상실감에 지나지 않는다.

'관계’라는 틀은 이미 가족이 해체된 주인공에게 의미를 잃어버린지 오래지만, 부딪치는 현실 속에서 사소한 일에도 폭발해버리는 폭력성은 죄의식의  몸부림이기에 이성의 언어는 닿지 않았다. 그것은 스스로를 망가뜨려 파멸로 몰고 가려는 의도이면서, 아이들에게 다 쏟아 붓지 못한 사랑이 내면에서 응어리져 정화되지 못하고 뒤틀려 분출하는 절망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주인공의 폭력성은 죄의식과 응어리진 고통에서 나오는 의도된 자기 분출이다.


보스턴의 을씨년스러운 겨울 풍광은 아픈 상처를 안고 건물 잡역부로 홀로 살아가는 주인공 ‘리’의  수통스로운 삶을 더 건조하게 만든다. 하루하루는 살아가야하는 날이 아닌 그저 살아내는 시간이다. 언뜻언뜻 치고 들어오는 과거의 그림자는 현재와 혼재돠어 아프게한다. 그렇게 내려놓은 삶에 또 다른 운명적인 실타래를 풀어 가야할 숙제가 주어진다.


자식이라는 소중한 가족잃어버린 경험으로ㅡ영화의 오프닝에서 리가 조카에게 하는 첫 대사인 “경험이 내 행동을 결정하는 거야”은 먼 훗날을 예견하며 주인공이 스스로에게 던진 화두였을까ㅡ 형의 죽음 앞에서 어떤 감정도 꾸리지 않았다. 이미 다 소진되어 슬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한 표정으로 주검을 응시할 뿐이다. 형의 유언으로 후견인이 돼 떠맡게 된 조카와의 어색한 동거는 잔인한 기억의 진원지인 맨체스터라는 격절된 공간을 불러내 과거 속으로 되돌아가는 계기가 된다.   

형의 죽음은 격절된 과거의 시공간을 불러내온다.


“당신이 겪은 고통은 아무도 이해 못해요. 그게 사실이죠.”

조카와 함께 형의 유언장을 들으러 변호사를 만나는 자리에서 변호사가 리에게 하는 말과 함께 감당할 수 없는 과거의 이야기가 들춰질 때야 비로소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세 딸을 자기 눈앞에서 잃고 난 후 아내와의 결별, 그렇게 가정은 무너지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홀로 살아가는 이유를.

그런 만연한 삶 속에 불현듯 들어온 조카와 사사건건 대립하며 불편한 동행을 이어가지만 영화 후반 거리를 좁히려고 형의 애장품(총)을 팔아 조카가 원하는 배의 모터를 갈아 끼우고 함께 바다로 나가는 장면ㅡ영화 전체를 통틀어 리가 웃는 단한번의 모습이다ㅡ에서 서로가 닮아있는 함몰된 불행(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죽음. 아이들의 죽음)를 조금씩 메꾸어가려는 교감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죽은 형이 부여한 새로운 가족이란 이름으로 치유해 나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새로운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는 과거를 치유하는 과정이다.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가 돼버려 역시 새로운 가족이라는 의미를 부여받고 살아가고 있는 과거의 아내를 애써 외면하지만 그런 전남편을 용서하려는, 아니 지금 새로 얻은 이기적인 행복에 대한 미안함, 아득한 침잠의 그리움과 죽여 버린 과거의 상흔이 한꺼번에 밀려와 북받치는 감정을 토해내는 두 사람의 만남은 미치도록 가슴이 아려온다. 그들의  곪은 시간 안으로 들어가 깊은 상처와 고통의 세월 속에 박혀있는, 그 무엇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언가를 허물어뜨리려는 대화는 독백처럼 진동하고 허공으로 떠돈다.     

서로가 주고받는 대화는 독백처럼 진동하고 허공으로 떠돈다.


리가 조카와 배낚시를 즐기는 장면은 수미쌍관식의 오프닝과 앤딩장면으로 첫 장면이 아직은 둘 다 불행이 삶의 깊은 이름이 되기 전의 과거라면, 이미 지나간 불행들을 끌어안은 체 살아가는 현재로 마무리된다. 이 때 이 둘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다르다. 흔들리는 배라는 공통된 공간이지만 오프닝은 위태롭게 서서 낚시하는 모습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면, 탁트인 바다를 바라보고 삼촌과 조카가 앉아 여유롭게 낚시하는 보다 안정적인 구도의 앤딩을 보여주고 있다. 곧 닥칠 불행을 맞이하는 시작과 이를 극복하고 희망을 바라보는 끝이 대비되는 장면이다.

오프닝의 불안한 시선과 앤딩의 안정적인 구도는 이들이 겪을 앞날을 예고한다.  다가올 불행과 희망을 바라보는.


영화에서 플래시백이란 주인공의 과거 사건의 충격을 드라미틱하게 표현하기 위한 의도로 영화의 내러티브와 치밀하게 통합되어 등장인물 감정의 발생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전개 과정을 보여 주는 기능을 한다.* <맨체스터 바이더 씨>의 과거는 미처 준비할 새도 없이 별안간 훅치고 들어온다. 과거를 회상한다 라기 보다는 현재의 일부분으로 이야기가 삽입된다. 마치 아침의 현재, 낮의 과거, 다시 저녁의 현재 같이 과거를 잘게 잘라서 현실 사이사이에 겹겹이 붙여 놓았다(만일 이야기를 한 줄로 세워놓고 순서대로 전개됐다면 이토록 오랫동안 감정에 잠겨버린 시간이 지속될 수 있었을까).     


주인공 ‘리’ 역을 맡은 케이스 에플렉의 표정하나 없는ㅡ단 한번의 눈물과 웃음을 제외한ㅡ그 표정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내 얼굴 근육도 덩달아 긴장되는 느낌이다. 그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영화 <갈리폴리, 1981>에선 전쟁의 참혹함과 비장함의 배경으로 , 여배우들의 서릿발 연기가 여전히 기억나는 한국 드라마 <즐거운 나의 집, 2010> 에서는 경쾌한 편곡의 타이틀곡(knife) 으로 흘렀던 ‘토마조 알비노니’의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 Adagio in G minor> 는 영화에서 주인공의 감정을 대변하고 살아남은 자의 고통스런 삶에 이입되어 더욱 애잔하게 흐른다.



* 플래시백(flashback) : 지식백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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