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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팔 Jun 27. 2021

사우다지(Saudade) : 부재에 대한 감정.

첫번째 - 떠나보낸 자를 위한 사우다지

오래전,

해거름으로 밤이 내려앉기 시작한 뉴욕 거리를 걷고 있었다.

거리의 네온과 가로등이 숨을 쉬기 시작할 무렵,

가냘프게 불어오는 미풍이 생기를 찾아가는

이 거대 도시의 밤을 스쳐 지나갔다.

이국의 공간 속에서 스멀스멀 엄습해오는

압도당한 분위기에 갇혀있던 나는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 올랐다.

흘러갔다가 되돌아오곤 하는 바람이 잦아들 듯 멈추고,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동안 멍하니 맨해튼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이 감싸 안은 밝음 속을 그렇게.    


병실은 밝음 속 깊은 어둠이었다.

이미 들숨을 포기하신 듯 기계가 토해내는 날숨에 의지하여

생의 인연들을 하나둘 놓고 계신 장모님 얼굴은 평안했다.

이 공간의 침묵과 익숙한 긴장감은 그때 어딘가를 닮을 듯 보였다.

심장박동기 경고등은 맨하튼의 고층 건물 항공장애등처럼

바쁘게 점멸하고 있고,

계기판 숫자가 떨어질 때마다 내보내는 날카로운 신호음은

센트럴역을 빠져나가는 열차의 출발 소리처럼 들려왔다.

아내의 기도가 끝나자

완만한 곡선을 그리던 장모님의 바이탈사인은

뉴욕시의 길게 늘어진 도로처럼

한줄기 곧은 선이 질주하고 있었다.     

당직 의사의 죽음 선언에는 어떠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감당해야 할 일들은 오롯이 남겨진 자들 몫이라는 걸

암묵적으로 일러주는 것이리라.

돌이킬 수 없는 그 짧은 언도는 긴 슬픔을 예고한 채로.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파리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곳에 있을 시간이 삼일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무언가를 해주려는 ‘행위 주체’로서가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살아있는 ‘존재 주체’로서의 고마움이다.

본질적인 사랑은 그렇게 곁에 머물 때 절실하고,

헤어질 때 더 간절하다. 그 짧은 나날들로.    


흐느끼는 가족을 뒤로하고 장례 준비를 위해 병원 밖을 나왔다.

내가 뉴욕 거리를 잊게 된 건 세월이 지나

그저 기억 속에서 멀어질 때가 됐기 때문일 뿐,

더는 보고 싶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훗날 아내가 눈물을 거두게 될 때 또한

더는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그럴 때가 됐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럴 때’라는 시간적 의미를

참 쉽고 무책임하게 내뱉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완성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게 한다.

그럴 때여서 사랑하고 그럴 때여서 용서고,

그럴 때여서 잊어야 하고

그럴 때이기 때문에 아파야 하는...

결국 ‘그럴 때’의 연속성 속에서 살아온 날들과

또 다른 ‘그럴 때’를 마주할 날들만 남아 있지 않은가

어쩌면 그럴 때를 알아간다는 것이, 받아드린다는 것이

낡아가는 삶을 집착하않고 흘려보내는 길인지도 모른다.

떠날 때까지.     


장례식장으로 들어선다.

여명의 하늘에서 빛을 잃어가는 마지막 별 하나가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다.

모든 걸 기억해야 할 시간이다.

지금은 그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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