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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삐 Sep 18. 2020

네? 패션 우울증이라고요?

커터칼을 들고 선 당신에게.

별 게 다 유행이네, 라는 시선.

 얼마 전, 뉴스에서 한 기사를 접하고 꽤나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 손목을 커터 칼로 긋는 등의 행위에 중독돼 타인의 관심을 갈구하는. 소위 말해 '패션 우울증'이 말 그대로 '유행'이라는 기사였죠. 특히 10대, 20대 들의 SNS에서 그러한 게시물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는 말도 함께였습니다. 댓글들 중에서는 "할 일이 저렇게 없냐", "그럴 시간에 공부나 하던가 하지 하여간 관심병자들 ㅉㅉ", "너희 때문에 진짜 환자들이 싸잡아 욕먹는다." 등의 부정적인 코멘트가 대다수였죠. 평소 같았으면 그저 스크롤을 내리거나 다른 페이지로 갈아타 저의 남은 할 일을 마무리 지었을 테지만, 그 날은 결국 먹먹해지고야 말았습니다. 왜냐면, 제가 전문의와 상담한 뒤 '약을 줄이기로' 결정한 날이었기 때문이었죠.


 어렵사리 고백하는 것이지만, 저는 양극성 장애를 수반한 경계성 인격장애로, 흔히들 말하는 '조울증'과 '조현병'.  더 나아가 과장하고 좀 더 자극적으로 표현하자면 '성격파탄'에 가까운 장해를 앓고 있습니다. 처음 정신건강의학과 문에 들어섰을 때가 갓 중학생이었으니 거진 17년 이상 약물을 복용해 온 셈이지요. 바리움, 리튬, 에트라빌, 심발타, 쿠에타핀, 아티반.... 이제 웬만한 관련 약들에 대한 지식은 베테랑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이렇게나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어쩌면 용기가 부족해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저 역시 소위 말하는 '패션 우울증' 환자였다는 점입니다.



관심이 필요했던 내가 이젠 사시사철 팔 토시가 필요해.


 처음 '그 행위'를 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이지메 문화'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이었을 겝니다. 전학을 온 학교에서 별 시답잖은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던 제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인해 학용품이었던 커터칼에 손을 댔던 기억이죠. 꽤나 '변태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다분히 '육체적인 고통'이 절실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적어도 내가 피를 흘리는 순간 동안에는 '정신적인 고통'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게 웬 걸요. 갓 아물어가는 상처를 보곤 저의 부모님, 선생님. 심지어 몇 안 되는 친구들마저 저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게 아닙니까. 물론 몇몇은 저를 무서워하고 기피했지만, 그 마저도 일종의 '관심'이었기에 저는 점점 자해에 중독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미숙한 생각이 부정의 뿌리를 내리고 자라 가지를 뻗고는 나무가 되고 숲이 됐죠. 급기야 저는 폐쇄병동에 들어가기까지 했었답니다.

이젠 타투로도 가려지지 않죠.

  후로도 몇 번의 입퇴원 끝에 간신히 검정고시와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만, 성인이 된 제게 '발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퍼석한 상처가 가득한 왼팔만이 훈장처럼 떡 하니 자리 잡고는 다른 이들에게 불쾌함을 안겨주기 일쑤였죠. 초창기에 시작한 자해에 누군가가 관심을 보이면 마냥 좋다고 그 행위를 반복했고, 그런 제가 두려워 떠난 이들의 관심을 돌리려 다시 한번, 여러 차례 수도 없이 다람쥐 쳇바퀴를 돌리곤 했습니다. 애초 '정신적인 고통'을 잊으려 시작한 행동에 목적이 사라진 지 오래였죠. 그럴수록 저의 정신세계는 피폐해져 약물 중독에 이르게 되고, 몇 번의 커다란 사고를 치고야 맙니다. 끝까지 저의 손을 놓지 않았던 가족들마저 등을 돌리곤 왕래가 끊기기도 했습니다.


 제게 남은 것이라곤 병원 치료비 고지서와 검은색 팔 토시 여러 장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친구가 없지 가오가 없냐.


 시간이 흘러 혼자만의 겉껍질을 만들어 세상과 고립되어 있는 동안, 행위는 정신마저 지배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실제로 제가 진정으로 우울해서 극단적인 선택으로 위와 같은 행위들을 저질렀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글에 차마 옮겨 담을 수 없는 끔찍한 행동도 취한 적이 있습니다만 지금은 그에 대해 말하고 싶지는 않군요. 다만 이 글을 읽는 소위 '패션 우울증' 환자들이 조금이라도 마음의 방향을 틀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써 내려가는 거니까요. 앞서 말씀드렸듯 '행동은 정신을 지배' 한답니다. 실제로 내가 우울하지 않아도 그러한 행위를 함으로써 우울하다, 외롭다 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나의 고충과 고민, 나약함과 번민을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 그리고 그럴 대상조차 없고 심지어는 관심조차 받고 있지 않아서. 타인을 향한 '그리움'이 내 마음 안에 그득그득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요.


 하지만 소위 '패션 우울증'이 악화돼서 진정 심각한 우울증 내지 자살 충동으로 이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대로 세상과 작별하실 셈인가요? 곧장 굿바이를 외치며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실 건가요? 에이, 그러기엔 너무 꽃다운 나이, 아름다운 인생이잖아요 우린. 그렇게 의미 없이 스러져 사라지기엔 너무 안타깝잖아요. 주변 사람들의 "쟤 이상한 애야. 친해지지 마." 라며 수군대는 소릴 듣기에 우리는 남들의 생각보다 더 뛰어나고, 마음이 따뜻하고 능력이 있단 말입니다. 한 마디로 쪽팔리지 말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울은 말이죠.


우리는 늘 행복할 수만은 없습니다. 당연한 것을요. 다만, 높낮이가 없는 음악이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우울을 통과 못한 사람 또한 다른 이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할 순 없을 겝니다. 아직 우울의 최고점을 지나지 못한 사람도, 우울의 이정표조차 만나지 못한 이도 있을 거예요. 사실, '지나간다'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삶 전체를 관통하는 감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제게 '우울'은 그러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살다 보면 누구나, 언젠가 반드시 겪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해'라는 과잉의 우울을 토해내는 장면들을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우울이 그 사람을 가공하는 과정이라 해도, 병적으로 자신의 환부를 드러내는 행위는 '옳지 못하다'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내가 그랬듯이요.


우울은, 피가 뚝뚝 흐르는 살갗이 아니라 그 흉터를 매만지는 담담함이어야 합니다.

우울은, 날 것 그대로 토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수놓는 인생의 무늬여야 합니다.


괜한 오지랖이라 할 수도 있지만 당신이 예전 제 모습이 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에둘러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보았습니다. 부디 한 분이라도, 이 글을 읽고 과거의 제가 했던 행동들을 멈춰주길 고대할 뿐입니다.


혼자라 생각하지 마세요.

스스로 상처 내지 말아요.


설사 그대가 우울에 잡아먹힌다 해도, 누군가는 마음에 열꽃이 핀 당신의 손목을 꼭 잡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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