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국가에서 인정한 ‘난임 여성’이다. 처음부터 난임 병원의 문을 두드린 것은 아니었다. 한창 정치부 기자로 바쁘게 뛰며 결혼을 준비할 당시 별 생각 없이 산부인과에 가서 웨딩 검진을 받았다.
“엇? 아무래도 이상한데…대학병원 가 보세요”
감기와 위염 등 각종 잔병 치레는 있을지언정 대학병원으로 가보라는 진단은 처음이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대학 병원에 가니 ‘자궁내막증’이라 진단했다. 당장 수술을 해야 된다고 했고 동의서를 내밀었다.
“심각하면 나팔관을 제거할 수도 있어요. 그 부분도 동의해 주실 수 있나요?”
나팔관 제거라니…. 의사에 말에 도망치듯 진료실에서 나왔다. 어머니에게 이 소식을 전하며 세상이 꺼질 듯 울었다. 당시에는 그저 여성 기관을 절제할 수 있다는 자체 만으로 너무 무서웠다. (당시에는 사형 선고처럼 들렸지만 나팔관 절제는 자궁외임신 혹은 여성 질환 등의 이유로 있는 종종 진행되고 절제하더라도 자연 임신이나 시험관 임신이 가능하다)
혹시 진단이 틀린 것은 아닐까, 어머니의 간곡한 설득에 다른 병원을 갔다. 진단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한 의사는 수술 권유 대신 나를 혼냈다.
“그렇게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식사를 거르거나 대충 인스턴트로 때우고 일하면 백만장자 됩니까? 엄마 될 몸인데 이래서 되겠어요? 이런 몸에서 아기가 살고 싶겠어요? 아기에게 좋은 옷 사주고 좋은 학원 보내면 그게 부모 노릇입니까? 쓰레기장처럼 앓는 몸에서 아기가 잘 살 수 있겠냐고요”
‘나팔관을 뗄 수 있다’보다 가슴을 후벼 파는 말들이었다. 일을 하느라 몸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건 사실이었다. 기자란 일은 시간에 쫓기는 일이다. 정해진 시간까지 기사를 마감하지 않으면 방송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밥보다 일이 중요했다. 편안한 마음보다는 일이 급했다. 건강보다는 일이 우선이었다. 내 꿈을 위한 수많은 선택들이 돌연 방향을 바꿔 내게 삿대질 퍼붓는 꼴이었다. 지금이라면 "제 몸도 제가 맘대로 못하나요?" 라든가 "꼭 애를 낳아야 하나요?"라며 소심한 반항이라도 할텐데 그땐 그저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병원 한 두 곳을 더 방문했고 수술 대안으로 임신을 권유받았다. 자궁내막증은 임신을 방해하는 병이지만 공교롭게도 임신을 해야 병의 진행이 멈춘다고 했다. 아직 내막증 혹이 크지 않아 시도해볼 만하다고 했다. 다들 임신이 답이라 했다. 빨리 임신을 해야 내가 건강해진다고 했다.
생각해볼 여유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아이를 원하나?’ ‘잘 키울 수 있을까?’ 고민도 하기 전에 그냥 나는 아이를 원해야만 하는 사람이 됐다. '꿈'을 향해 맞춰있던 내 방향키가 '아기'로 항로를 바꿨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임신 준비’로 내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