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 기준이 되어버린 '임신'
내가 속해있던 정치부는 보도본부 내에서도 바쁜 부서로 손꼽힌다. 아침 7시 30분까지 출근했고 퇴근 시간은 정해진 게 없었다. (주 52시간이 시작된 후에는 조금 나아지긴 했다)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아침 신문을 훑고 국회 기자실에 도착하자마자 각 정당의 일정과 기사 계획을 보고하고 그 후 취재하고 기사를 쓰면 정신없이 하루가 훌쩍 가 있었다.
무엇보다 기자에겐 완벽한 퇴근이란 없었다. 취재원과의 저녁 약속이 있거나 퇴근 후에도 종종 취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곤 했다. 6시간 자는 일도 쉽지 않았다. 여유란 없었다. 임신이 잘 되려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몸이 편안해야 한다는데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결국, 부서를 옮겼다.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는 편집부를 자원했다. 취재와 기사 쓰기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부서여서 상대적으로 일 부담도 덜했다. ‘한창 경력을 쌓아야 할 나이에 이래도 되나’ 마음 한편이 불안하기도 했지만 일단 임신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일단, 아이부터 낳고 보자. 일은 그다음부터 하면 되지’라는 마음이었다.
부서뿐 만이 아니다. 모든 선택들이 ‘임신에 도움이 되느냐’에 따라 결정됐다. 퇴근이 늦어서, 너무 피곤해서, 시간을 절약하고 싶어서… 다양한 이유로 외식을 자주해 왔지만 무조건 집밥을 해 먹었다. 아무리 비싸도 유기농 재료들을 샀다. 인스턴트로 물든 내 몸을 세탁해야만 할 것 같았다.
샴푸와 치약 등 생활용품도 바꿨다. 성분을 꼼꼼히 따져 몸에 좋지 않은 화학 성분이 없는지 살폈다. 무엇보다 향이 없어야 했다. 향은 배아가 싫어한단다. 섬유유연제와 향초, 향수와 탈취제 등이 우리 집에서 사라졌다. 머스크 향이 나는 바디로션을 바르는 게 낙이었는데 더 이상 구입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도 바를 수 있는 무향 로션을 사용했다.
운동도 시작했다. 바쁘게 일을 할 땐 사실 엄두를 못 냈다. 녹초가 된 채 퇴근했고 주 6일 근무가 일상인 탓에 남은 하루는 잠을 보충해야만 했다. 이제는 여유가 생긴 만큼 수영과 필라테스를 등록했다.
마치 고 3이 수능만 바라보듯 ‘아이 없는’ 기혼 여성인 나는 삶의 기준을 ‘임신’에 맞춘 것이다. 긍정적 효과도 있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고 자연히 생리통도 감기 같은 잔병도 사라졌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바라던 자연 임신은 되지 않았다. 1년 후 난 시험관을 권유받았고 ‘임신이 도움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행동 기준들은 더욱 나를 옭아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