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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Nov 18. 2020

네가 사랑한 건 너야.

《당신이 내게 최면을 걸었나요?》

《당신이 내게 최면을 걸었나요?》, 리안 모리아티 지음, 마시멜로, 2018

'엘런'은 데이트 앱을 통해 '패트릭'이란 남자와 만나게 되고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만날수록 더 좋아지는 남자. 결국 내 연애가 그간 실패로 끝났던 것은 결국 이 사람에게 닿기 위한 게 아니었나 싶게 만든 남자.



엘런은  실패로 끝난 자신의 과거 연애를 늘 뭐랄까, 정말로 실패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엘런은 그 세 번의 연애가 사실은 지금 이  해변에서의 순간이라는 운명적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기초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패트릭 스콧이라는 녹색 눈의  측량사에게 닿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였다. (p.37)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연애를 하고 이별을 하고 나면 늘 언제나 슬프고 힘들지만, 언젠가의 연애에서는 '결과적으로 그  모든 연애들이 그런 식으로 끝난 것이 내게 행운이었다'라고 생각하게 됐던 거다. 만약 그 연애들 사이에 결혼이라도 끼어있었어 봐,  나는 지금 이 남자를 만날 수 없었을 거 아냐! 

분명 헤어지고 다시 혼자가 되는 힘든 시간들을 겪었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결과적으로' 좋았다고 생각했던 일이 내게도 분명 있었던 거다.


그러나 연애를 하고 헤어졌다고 해서, 다시 싱글이 됐다고 해서 그 사랑이 '실패한' 사랑은 아니라고, '마리 루티'가 자신의 책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사랑에 실패란 있을 수 없다고 나는 마리 루티의 말을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장기적인 안정성을 기준으로 연애의 성공을 측정하곤 합니다. 남녀 사이에 다툼이 생기면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지속석 외에도 다른 목표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영혼을 건드리지 않는 밋밋한 관계를 오래 끌고 가느니  아주 잠깐이라도 무모한 열정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불안정한 관계를 좇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안정감, 편안한, 신뢰감이 추구할 가치가 없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하지만 사랑의 가치를 이런 식으로만 평가한다면  우리는 사랑의 근본적인 소명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감동적인 통찰은 사랑의 좌절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좌절은 인생의 방향을 전체적으로 재평가하게 만듭니다. 그것이야말로 좌절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보상인  셈이죠. - 《하버드 사랑학 수업》, 마리 루티, pp.22-23


《하버드 사랑학 수업》, 마리 루티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12



엘런은  패트릭을 만나기 위해 결국 이렇게 돌아온 것일까, 를 생각하는데 패트릭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다. 과연 그 말은  무엇일까. 나는 혹시 프러포즈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할 말이 있다고 한 뒤에 나쁜 말을 듣고 싶진 않으니까. 실제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라고 한 뒤에 고백을 들은 적도 있어서, 당연히 흐름은 그렇게 가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엘런은  '우리는 아닌 것 같다, 그만 만나자'는 말을 듣게 될까 두려워한다. 잠깐 그가 화장실 간 틈을 타, 그는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려는 거구나, 그만 만나자고 말하려는 거구나, 두려워하고 겁을 먹는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것처럼 '너를 사랑해' 하는 고백도  아니고, 엘런이 생각한 것처럼 '그만 만나고 싶다'는 고백도 아니었다.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 그에게 스토커가 있다고  한다. 스토커가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패트릭은 '사스키아'란 여자와 사귀었고  함께 살기도 했다. 사스키아는 패트릭의 애인이면서 동시에 패트릭의 아들인 '잭'의 엄마 노릇을 했다. 사스키아가 채 준비되지  않았는데, 사스키아는 아직 사랑으로 가득 찼는데, 그런데 패트릭은 사스키아에게 '그만두자'라고 말을 했던 거다. 그 후로 계속해서  사스키아는 패트릭의 뒤를 따라다니고, 그가 없는 동안 집에도 들어갔다 나오고, 아들의 축구경기를 보러 가고, 이메일을 보내고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패트릭이 그만하라고 해도 막무가내. 그녀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자신에게 패트릭이 없는 게, 잭이  없는 게.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사귀려고 하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결국 그녀는 패트릭이 새로 만나기 시작한  '엘런'이 최면술사란 직업을 가진 걸 알고 그녀에게 찾아가 가명을 대고 최면을 받으며 엘런의 내담자가 되기까지 한다.



'리안  모리아티'의 책은 읽을 때마다 항상 수다스럽게 느껴졌다. 조용히 은근히 감상할 수 있는 책이라기보다는 할리우드 영화를 한 편  보는 것 같은, 그것도 시끄러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딱히 좋아하는 작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쓰는 건 사실이다. 한 번 손에 잡으면 놓기가 힘드니까. 게다가 수시로 '나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그렇지만, '엘런'에게 이입이 되지 않아 초반부터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가 좋아하기 시작한 남자가 전 여자 친구로부터 아직 정리되지 못했다는데, 나는 너무 짜증이 나는 거다. 그런데 엘런은 그녀가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기는 거다. 좀 재미있게 생각한달까. 나는 이런 엘런의 심리가 이해되지 않아서 너무 싫은 거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나에게 '전 여자 친구가 스토커가 되어서 쫓아다녀, 지금 여기에도 와있어'라고 하면 너무 스트레스받고 무섭고 걱정될 것  같은데, 그리고 이 관계를 어쩌나 고민할 것 같은데, 엘런은 그렇지가 않은 거다. 왜 스토커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 아  스트레스…



그런데 놀라운 건, 읽다 보면 나 역시 스토커인 '사스키아'에게  이입하게 된다는 거다. 나는 아직 사랑이 끝나지 않았는데, 그런데 왜 그는 내게 끝났다고 하는 거지, 나는 여전히 그의 옆자리가  내 자리인 것 같은데, 왜 그는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두려고 하는 거지. 노 이해… 이런 마음, 너무 잘 알겠는 거다. 그를 향한  집착,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랑. 그게 뭔지 너무 알겠어서, 그래서 또 스트레스인 거다. 내가 사스키아, 이 스토커랑 다른 게 뭔가,  이 집착, 이 열정, 이 미련… 모두 다 내 것인데, 나나 사스키아나 별다를 바 없는 거 아닌가. 스토커에게 이입하다니,  그래도 되는 것인가… 막 이렇게 되어가지고 스트레스가 대박 찾아오는 거다. 나… 스토커 가능성 있는 건가. 이래서 너무  스트레스 ㅠㅠ



누구나 사랑을 잃고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힘이 든다. 게다가  사랑하는 사이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가깝고 친근했는가, 얼마나 많은 걸 나누었는가. 우리가 그저 친구였다면 계속 그렇게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여전히 다정할 수 있을 텐데, 우리가 애인이었으므로 다시는 이 뜨거운 사랑을 줄 방법도 없고 그의 다정함을 느낄 수도  없다니. 가장 가까운 사이가 어떻게 이토록 가장 먼 사이가 되었나, 다시 보지 않을 사이가 되었나, 너무 슬프잖아. 아, 이별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을.



한  사람과 아주 친근한 관계를 맺고 매일같이 함께 자고 일어나고 주기적으로 엄청나게 사적인 일들을 함께하다가 갑자기 그 사람의  전화번호는 물론, 어디에서 사는지, 어디에서 근무하는지, 오늘은 무엇을 했는지, 지난주에는, 작년에는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는  사이가 되다니, 엘런에게는 가끔 그런 상황이 아주 기묘하고도 잘못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p.38)



매일을  어떻게 보내는지, 매시간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주말에는 무얼 하는지 죄다 알고 있다가 이제는 어디에서 사는지, 무얼 먹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다는 거, 엘런 말대로 너무 기묘하고 잘못된 것 같잖아. 그렇지 않은가요, 여러분?  슬픔의 새드니스…




엘런과 패트릭의 사랑은 무럭무럭  자란다. 사스키아가 졸졸 따라다녀도 그들의 사랑은 무럭무럭 자라. 그렇다고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엘런은 '나는 사스키아만큼  패트릭을 사랑하지 않는다, 내 사랑의 크기는 그보다 작다'라고도 생각하고, '내가 이 남자를 사랑하는 게 맞나, 나는 그저  사랑에 빠지고 싶었던 건 아닌가'도 수시로 자신에게 묻는다. 사랑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깊어가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 남자 때문에  짜증도 난다. 아아,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지금 아버지 사진은 하나도 없냐고 물은 건가? 그러니까 내 얘기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거네? 내가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한지  벌써 몇 년은 됐다는 듯이, 자세한 내용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거야? 엘런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또다시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스꺼워졌다. 내가 이 사람하고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생각에 절실하게 매달려 있는 거면 어쩌지? 이 사람에 대한 모든 생각이  내 지나친 망상이면 어쩌지? 이 사람이 사실은 그저 피상적이고 이기적인 멍청이라면 어쩌지? (p.124)




그  사랑은 무럭무럭 자라나 이제 그들은 같이 살기로 한다. 그렇게 패트릭과 그의 어린 아들 잭은 엘런의 집으로 짐을 싸가지고  들어오는데, 아아, 여기서 또 한 번 스트레스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까 데이트할 때는 몰랐는데, 데이트할 때 그의 집에  가서 자고 그럴 때는 몰랐는데, 이 남자가 세상에,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사람이었고, 오래된 짐을 가져와서 놓고는 그걸  치우라고 치우라고 잔소리를 해도 치우지 않는 사람이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엘런은 이제 딥빡이 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씨양 내가 뭘 한 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스트레스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되어버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아, 이 부분에서 나 엘런하고 같이 대박 스트레스받았다. 그러게, 혼자 살아 이 여자야!! 막 이렇게  일어나서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달까.




"다 패트릭 거지?"

매들린이 덥석 그 주제를 잡았다.

"맞아. 계속 옮겨달라고 부탁했거든. 상자 때문에 미칠 것 같아. 잔소리를 하지 않고 남자가 일을 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엘런이 물었고,

"오호, 그거야말로 10억짜리 질문이군."

매들린이 대답했다. (p.408)



아아 스트레스 스트레스. 엘런은 그러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속삭이지만, 자꾸만 상자는 언제 치울 거냐고 묻게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외조부가 살던 이 집이 패트릭의 짐으로 좁아지고 지저분해졌어, 아 빡침이… 이렇게 되어버림 ㅋㅋㅋ 


그러나 무릇, 사랑이란 무엇인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살게 되는데 어찌 순탄하기만 할 것이요, 이렇게 마찰이 일어나면 해결해 가면서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짐을 치우지 않는 패트릭과 거기에서 빡침 오는 엘런을 보면서 건지 아일랜드 생각을 했다. 건지 아일랜드에서도 약혼자가 같이 살러  들어오기 때문에 책장의 절반을 내어줬더니 거기에 트로피만 잔뜩 진열하는 남자가 나왔더랬지. 나중에 여자는 약혼자랑 헤어지지.  후훗.



그러나 사실 엘런이 패트릭과 결혼하게 되는데 가장 망설이는 이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민은 따로 있었다. 어쩌면 그가, 패트릭이, 죽은 그의 아내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자신과  비교하며 자신을 그만큼 사랑할 수는 없을 거라는 것. 그 점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늘 그녀를 괴롭힌다. 내가 지금  사랑하는 이 남자가, 그러나 나를 '가장'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것. 

슬픔의 새드니스…

우리는 이렇게 다들 각자의 슬픔을 안고 사는 건가요.




한편, 스토커  사스키아는 패트릭의 애인으로서 그리고 잭의 엄마 역할까지 잘 해내면서 행복했다. 게다가 패트릭의 부모님들까지도 자신을 좋아하고  다정하게 대해줬고. 그런데 패트릭과 헤어지니 잭도, 그리고 패트릭의 부모님도 잃게 된 것이다. 자신은 이곳에 다정하게 지냈던 사람,  소속감을 느끼던 사람이 이들뿐이었는데, 그런데 한꺼번에 이들을 모두 잃게 된 것이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잃었지만, 그 사람들을 대체할 사람들을 나는 충분히 알지 못해. 나에게는 이모도, 고모도, 사촌도, 조부모도  없단 말이야. 나는 백업이 되어줄 사람들을 마련해두지 못했어. 이런 상실을 겪었을 때 나를 지탱해줄 보험을 들어놓지 않았어.  (p.225)



사스키아가  패트릭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 그의 집에 침입하고 그의 새로운 애인을 감시하는 것 모두, 그녀에게는 패트릭  외에 다른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집착할 수밖에 없다. 항상 같이 있고 싶고  생각나고 보고 싶고. 헤어진 뒤에 상실감 역시 어마어마할 것이다. 늘 친근했던 그의 소식을 이제 알 수조차 없다니 얼마나 미칠  노릇인가.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그의 삶을 엿보고 싶고 누구를 만나는지 알고 싶은 건 당연한 욕망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스키아와  내가 같다. 그러나 사스키아는 그러기 위해 상대의 스트레스와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누굴 만나는지 보고  약속 장소에 따라가고. 그녀의 삶은 온통 그로 채워져 있다. 나는 그녀가 갈 데까지 간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스토킹을 하면서 그녀가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녀는 여전히 '그의 옆엔 내가 있어야 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그녀를 보면 화가 난다. 제발 날  따라다니지 말라고 말한다. 그렇게 스토킹을 하면서 그녀가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는 그녀의 바람대로 '역시 너만큼 날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어' 하고 그녀에게로 돌아올 것인가. 아니. 이제 패트릭의 새로운 여자 친구는 임신했다. 그 사실마저도  사스키아는 알게 됐고, 이 때는 정말 그녀가 미칠 지경에 놓인다. 아이고.. 참... 몰랐으면 미치지는 않았을 텐데. 게다가 초음파  사진 찍으러 패트릭과 엘런이 잭까지 함께 데리고 갔는데 거길 따라가서 통곡을 한다. 이 때는 정말이지 너무… 아니 이  여자야, 거길 왜 따라가서 자기한테 스스로 상처를 줘, 몰랐으면 됐잖아, 몰랐으면…

몰랐으면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ㅜㅜ



스토커에게도 스토커의 사정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이 이야기를 시작한 걸까, 싶었는데,

마지막에는 스토커가 상대에게 얼마나 고통을 주는지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얘기해준다.

사스키아  역시도 자신이 자신의 감정, 자신의 사랑에 빠져서 상대가 자신으로 인해 고통스러울 수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자신은  패트릭을 '사랑한다'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패트릭이 어떤 기분일까'를 생각해보지 않았던 거다.


나는 상대를 괴롭히는 사랑은, 그것이 상대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말한 것처럼 스토커의 경우에도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해', '내가 너를 이렇게 잊지 못해', '나는 늘 너랑 있고 싶어'라고 표면적으로 상대를 사랑해서라 말하지만, 그러나 스토킹을 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너무 지나치게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지 마', '하지 마', '네가 그러면 괴로워'라고 누누이 말해도 그걸 들을 생각조차 없는 거다. 자신의 사랑에 갇혀서  거절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리고 그 사랑이 너무 커서 도무지 상대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거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되어버리는데, 네, 그 사랑 크죠, 너무 큰데, 그거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이에요. 상대를 사랑한다면 상대를  괴롭히면 안 되는 거죠. 괴롭게 하는 게 무슨 사랑이에요.



사스키아가 뒤늦게라도 이걸 깨닫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당신이 계속 전화를 걸었을 때, 패트릭은 어떤 기분이었을 것 같아요?'

"당신이 갑자기 나타나면 패트릭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패트릭은 그날 밤 두려웠을까요?"

이상한 건, 지난 3년 동안 나는 패트릭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정작 패트릭이 어땠을지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거야.

"폭력을 휘두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육체적인 폭력만 폭력인 건 아니에요. 당신은 패트릭을 무기력하게 만든 거예요."

"무기력하게 만들다뇨? 나는 패트릭을 사랑했어요. 그저 다시 함께하기를 바란 것뿐이에요." 

"다시 생각해봐요, 사스키아." 

내  정신과 의사는 나를 어디로든 달아나지 못하게 했어. 마치 나를 거울 앞에 세워놓고는, 내가 자꾸 외면하고 다른 곳을 보려고 할  때마다 내 어깨를 붙잡고 다시 거울 앞으로 돌려놓는 것처럼 느껴졌어. 내가 손으로 눈을 가릴 때마다 그녀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고  내 옆에 가지런히 내려놓는 거야. 마침내 나 스스로 거울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게 말이야. (p.621)



진짜  반복해 말하지만, '너 없이 안돼'는 안된다. '네가 없어도 된다'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씩씩하게. 다른 사람들과도 다정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돼. 물론 당신이 있으면 내 삶은 더 즐겁고 행복해지겠지, 가급적이면 당신하고 같이 살고 싶겠지.  그러나 '너 없으면 난 못 산다'로 살아가면, 헤어짐을 견디지 못할뿐더러 상대를 괴롭히게 된다. 범죄자가 되는 겁니다.

사스키아가 자신이 '백업해둔' 인간관계가 없다고 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이 없으니 미치는 거다.

그러나  사스키아의 경우, 없다고 생각한 것 역시 자기 자신이었다. 그녀 곁에도 다른 사람들이, 친구랑 회사 동료들이 있었는데, 그녀가  몰랐다. 그녀가 그들을 관계라고 생각하지를 않은 거였어. 이게 그녀가 자신의 사랑 안에 너무 갇혀 있어서 그렇다. 자기 사랑에,  자기의 큰 사랑에 갇혀 있으니, 상대와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따라다니고, 주변에 있는 사람을 보지도 못해. 그것은 그렇다면  '상대를 향한 이토록 큰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내 사랑은 사랑이되 상대의 사랑은 타이밍일 수 있다. 

나 역시 내 사랑이 타이밍이고 상대의 사랑이 사랑이었던 적도 있고.

사랑이 그저 순수한 사랑이라면 좋겠지만, 사실 그렇게 시작되고 또 끝나는 관계는 드문 것 같다. 사랑이 식어서 헤어지기도 하지만, 사랑이 식는 것과는 별개로 다른 이유들로도 헤어질 수 있다. 

사랑은 중요하고 또 많은 것들을 해결해주지만,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순간순간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홀로 서는 것도, 살아갈 방향을 바라보는 것도, 때로는 애인과의 사랑보다 더 중요한 거니까.



내 정신과 의사는 패트릭이 나와 헤어진 이유가 사실 나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어. 그녀는 패트릭이 나와 헤어진 건 그 자신의 문제, 콜린을 잃은 슬픔 때문일 거라고 했어.

"만약 그때 회의장에서 만난 사람이 당신이 아니라 엘런이었다고 해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헤어졌을 거예요."

내 정신과 의사는 그렇게 말했어.

"아니에요. 두 사람은 소울메이트인걸요. 두 사람은 정말 서로를 사랑해요."

내가 말했어.

"타이밍의 문제예요." (p.623)



어디에서 어떤 타이밍이 어떤 방식으로 끼어든 걸까, 나는 계속 생각한다. 멈추지 않고 생각한다. 

이토록이나  큰 사랑을 품고서, 아무도 이렇게 큰 사랑을 품을 수 없다고 자부할 만큼 큰 사랑을 품고서는, 그러나 사랑하고 헤어지게 된 것은  어디에서 어떤 우연이 끼어든 걸까. 어쩌면 운명이란 큰 틀에서 이 시기에 누군가 들어오고 또 이 시기에 누군가 나가고 하는 것들이 다  정해져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이 정해져 있다면, 그래서 이 시점에 헤어져야 했던 거라면, 그렇다면 큰 사랑은 남겨두지 말고  같이 거둬갔어야 하는 건 아닌가. 이 감정은 남겨둔 채로 관계만 정리하라고 하면 그건 너무 엉망진창의 운명의 흐름 아닌가.  헤어지는 게 운명이었다면 고통스럽지 않아야 운명을 받아들일 거 아냐.

나에게는 사랑이었고 상대에게는 타이밍이었던 걸까.



누군가를 뒤에서 한참 응시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돌아보게 돼. 실제로 쳐다보는 사람을 보지는 못하지만 공기를 흐르는 기운이 다르다는 걸 느끼는 거야.

그게  바로 내가 패트릭을 오랫동안, 충분히 오랫동안 생각하면 패트릭이 나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이유야. 같은 방에서 한 사람을  오랫동안 쳐다봤을 때 그 시선을 느낄 수 있다면, 아무리 떨어진 지역에 있어도 엄청난 감정을 계속해서 보내면, 수많은 감정을  해일처럼 보내면, 그 감정을 느낄 수도 있는 거잖아. (p.145-146)



내가 지금 겁나 텔레파시 쏘고 있는데, 느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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