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락방 Dec 11. 2020

까만 사과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모스크바의 신사》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현대문학, 2018

'로스토프' 백작은 정부에 반하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메트로폴 호텔'에 연금되는 벌을 받는다. 호텔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총살될 거라는 협박과 함께. 그렇게 호텔 안에서의 생활만 해야 하는 그의 나이는 서른셋. 


다행히도   그가 연금된 호텔은 매우 큰 호텔이었다. 세탁실과 재봉실이 따로 있고 레스토랑과 바도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그에겐 숨겨둔  돈도  있었고 책도 있었다. 내가 여기에서만 살아야 하다니, 하는 절망 대신 그는 호텔에서의 삶을 잘 살아낸다. 물론 어느순간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호텔의 옥상에 올라가 떨어지려고도 한다. 그러나 그 때 호텔 직원이 그를 발견하고는 불러내어 따뜻한 시간을   갖는다. 그는 자신의 자살을 조금 뒤로 미루게 된다.



백작은 호텔에 찾아온 여배우와 점심을 함께하게 된다. 여배우가 개 두 마리를 데리고 체크인을 하는데, 개를 다루는데 서툴러 우연히  백작이 도와주게 된 거다. 개를 잘 다루지도 못하면서 왜 데리고 왔담, 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 여배우로부터 쪽지를  받게 된 거다. 첫인상을 만회하고 싶다는 것.



첫인상을 만회할

기회를 주세요

스위트룸 208호예요. (p.189)



위와 같이 쪽지에 쓰여있었던 거다. 쪽지라니!

쪽지, 쪽지란 무엇인가.


이십 대  중반 때 술집에서 친구들과 왁자지껄 술을 마시는데, 옆 테이블에 앉았던 남자가 나가면서 내게 쪽지를 주고 갔던 게 생각났다.  "연락 주세요"이러면서 친구와 나갔는데, 쪽지를 펼쳐보니 거기엔 (아마도) 그 남자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냥 찢어버렸다.  아하 하하하하.


쪽지, 쪽지란 무엇인가.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보다 첫인상이 상대에게 나 빠보 일 것 같아, 그러니까 처음 본 사람에게 내 인상이 나쁜 것 같아 그게 걱정되었던 여자.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레스토랑에서 마주쳤더니 뭔가 좀 괜찮은 느낌이 들었던 걸까, 웨이터를 통해 쪽지를 전달한 거다. '저 사람에게  내가 나쁜 인상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 첫인상이 별로였을 거란 생각에 쪽지를 전해주었다니.. 그러니까 그 마음, 첫인상 꼭  만회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너무 뭔지 잘 알겠지 않나. 

아마 많은 경우, 내 첫인상이 좋기를 바랐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때, 이 책 속 여배우 '안나'처럼 액션을 취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 어떡하지... 어떻게 만회하지.. 하고  발을 동동 구르지 않을까. 그러나 방구석에 앉아 발만 동동 구른다고 해서 갑자기 하늘에서 뿅- 하고는 '너 발 동동 구르는 게  안타까우니 첫인상을 만회할 기회를 줄게' 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런 것은 만화에서도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야. 만약 상대에 대한 내  인상을 바꾸고 싶다면, 다른 면을 보이고 싶다면 내가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안나는 그렇게 했어.


쪽지, 쪽지란 무엇인가.


쪽지를  전달해준 안나, 첫인상을 만회할 기회를 달라는 안나 덕에, 잠시 잠깐 '아, 나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보게 됐다. 만약  '그 사람'에게 내 첫인상이 별로였다면, 나 역시 그 첫인상을 만회하기 위해, 뭐든 하지 않았을까. 아마, 나는 뭔가 했을 거야.  상대가 그 사람이라면,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지. 왜냐하면 나는 첫인상부터 좋았으니까.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의 첫인상은 끝내줬지. ㅋㅋㅋㅋㅋㅋㅋ만회하고 뭐고 할 게 없었지. 나한테 첫눈에 반해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러면서  양재역에서 갈아탄 버스 안에서 혼자 낄낄대고 웃었다. 아이참. 나는 왜 졸라 매력 포텐 터져가지고 첫인상을 만회할 기회를 달라는 쪽지도 보낼 일이 없는 거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소설적 경험이 부족해지잖아?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처음부터 매력적인 거, 좀  별로네? 하하하하하.


그래서 백작은 안나가 있는 스위트룸에 가게 된다. 이야, 근데 진짜 안나 넘나 끝내주는 것! 그러니까 안나의 룸에 룸서비스로  오게 된 음식은 '검은 올리브와 회향과 레몬을 넣어 통째로 구운 농어 요리' (p.192)였다. 백작은 안나가 하던 이야기를  자연스레 다시 하게끔 유도하고자, 자신이 나이프와 서빙 포크를 가지고 농어를 바르려고 했단 말이야? 그런데!!



  

그러나  그가 손을 올리기도 전에 그녀가 나이프와 서빙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오후 시간을 빼앗아 간, 직업적으로 치러야 하는  일들에 관해 얘기하면서 칼끝으로 생선의 등뼈 부분에 금을 그은 다음, 머리와 꼬리 부분을 대각선으로 잘랐다. 그러고 나서 생선의  등뼈와 살 사이에 서빙 포크를 살며시 넣어서 능숙하게 살코기만 떼어내 접시에 옮겼다. 몇 번의 간결한 동작으로 회향과 올리브를  분배한 다음 살코기 위에 검게 탄 레몬을 얹었다. 깔끔하게 담아낸 접시를 백작에게 건넨 그녀는 등뼈를 생선에서 뜯어낸 뒤 남은  요리를 자신의 접시에 옮겼다. 이렇게 하는 데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어 그녀는 서빙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에 내려놓고 와인으로  주의를 돌렸다.

아차, 백작이 생각했다. 그녀의 기술을 지켜보는 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자신의 책임을 소홀히 한 것이었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와인 병의 목 부분을 잡았다.

"제가 할까요?"

"고마워요." 

백작은 와인을 따르면서 드라이한 몽라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에밀의 농어 요리에 아주 잘 어울리는 와인으로, 분명 안드레이가 골랐을 것이다. 백작이 여배우를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

"생선의 뼈를 전문가처럼 발라내는군요." (p.192-193)



저마다  사소하게 반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한 손으로 계란을 깨는 것에 반하고, 젓가락질을 잘하는 것에 반한다. 이런 사소한  것들. 생선가시를 잘 발라내는 것도 한몫하는데, 아아, 안나… 너무 휙- 휘리릭- 생선 가시를 발라내버렸어. 아주 멋짐!  그러니까 왜 그런 거 있잖은가.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지독히 자연스럽게 빵에다 버터와 딸기잼 촵촵 발라서 상대에게 먹으라고  내민다거나, 새우 껍질 다다다닥 까서 상대 그릇에 얹어 준다던가, 되게 사소한 그런 것들. 백작이 생선 가시 잘 발라내는 안나를  보고 넋을 잃어 와인 따르는 걸 잊어버린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 너무 멋져. 이런 사소한 행동들, 상대를 자연스레 배려하고  챙기는 모습들에도 반하고, 전완근이 불끈불끈하는 것도 반하고 뭐 그러는 거 아닌가! 생선가시 잘 발라내는 건 넘나  으뜸이다. 안나 매력이 뿜뿜 ♡



안나가 생선 가시를 전문가처럼 잘 발라내게 된  건 그녀의 어린 시절에 어촌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백작도 자신이 사과 숲에서 자라 온갖 사과를 먹었던 어린 시절에 대해  얘기하게 되는데, 아직 먹어보지 못한 흑 사과 얘기도 꺼낸다. 


 "그 지방 설화에 따르면 숲 속 어딘가 깊숙한 곳에 석탄처럼 까만 사과가 열리는 나무 한 그루가 숨겨져 있대요. 그런데 그 나무를 찾아서 열매를 먹으면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백작은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이 소소한 민담을 끄집어낸 것에 흡족해하며 몽라셰를 넉넉히 들이마셨다.

"그럼 당신은?" 여배우가 물었다.

"뭐 말입니까?"

"당신은 숲 속에 숨겨진 사과를 찾으면 그걸 먹을 거예요?"

백작은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생각에는 확실히 매력적인 게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어떻게 집과 여동생과 학창 시절의 기억들을 포기할 수 있겠어요." 백작이 탁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이 기억을 포기할 수 있겠어요?"

안나 우르바노바가 냅킨을 접시에 내려놓고 의자를 뒤로 밀치면서 일어나더니, 탁자를 돌아서 백작에게 다가가 백작의 옷깃을 잡고 그에게 키스했다. (p.196)



나와  있는 지금 이 순간의 기억 때문에 새로 삶을 시작하는 것을 시도하지 않겠다는 남자라니. 냅킨을 접시에 내려놓고 의자를 뒤로  밀치면서 일어날만하다. 그런데… 농어는 다 먹은 걸까? 다 먹고 일어나도 될 텐데… 와인은 침대에 갔다가 중간에 일어나서 다시 와  마셔도 되지만, 농어는 식으면… 다시 먹기 싫을 텐데… 찬 생선은 좀 별로잖아요?

탁자를 돌아 백작에게  가기 전에 와인도 한 병쯤 더 시켜뒀어야 되는 거 아닐까. 아, 너무 준비 안된 거 아닌가. 와인 부족할 것 같은데. 남녀가 둘이  저녁 먹으면서 와인 한 병이라니. 한 병 더 마셔야 하지 않나. 성인남녀라면 두당 와인 한 병씩은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뭐 이런 쓸데없는 얘기는 뒤로 젖혀두고,



나는 저 까만 사과에 대해 생각했다. 이 부분에서는 아마 누구나 그러지 않을까. 안나가 물었던 것처럼, 만약 그 사과를 발견한다면 나는 먹을 것인가? 삶을 새롭게 시작하려 할 것인가?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죽고 나면 모든 게 끝나버린다는 것, 그것 때문에 두렵다. 그래서 죽고 싶지 않고 오래 살고 싶다.  굵고 짧게 이런 거 말고 가늘고 길게 오래 살고 싶어. 가능하다면 죽지 않고 살고 싶다. 그만큼 내게는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고,  그렇기에 삶을 새로 시작한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언제든 다시 시작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런 게  가능하다니, 그 사과는 나를 위한 사과가 아닌가!


그러나 나는 결국 그 사과를 먹지 않을 것이다. 


백작이 말한 것처럼, 내게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기억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정말 없었으면 좋았을, 지워버리고 싶은, 잊고 싶은 기억들도 당연히 있다. 어떤 것들은 큰 상처가 되었고 큰 죄책감이  되어서 내 뱃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앉아있다. 그것들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것들을 지울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어떤 사건으로 말하여질 수도 있지만, 어쩌면 만남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런 '만남'이 없었다면 그 '일'도 내게  없었을 텐데..라는 식으로 내게 존재하고 기억되고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잊히지가 않아서, 혼자 있을 때면 한없는 우울  속으로 빠져들고 또 빠져들게 된다. 그때 내가 거기에 없었다면, 그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하고.



그렇지만  내게는 정말 소중한 기억들이 있다. 백작은 집, 여동생, 학창 시절을 얘기했는데, 내 경우에도 가족들이 그렇고 특히 조카가  그렇다. 조카가 '이모'라고 부르는 순간순간마다 내가 얼마나 자지러지게 좋아하는지. 조카의 손을 잡는 건 얼마나 행복인지. 게다가  둘째 조카가 태어나 아직 아가였을 때, 내가 안아주면 내 품에 머리를 포옥 기대고 잠이 들던 때를 기억한다. 아, 이 아이는 내  품에서도 잘 자네, 하며 누구보다 뿌듯해했었지. 이런 기억들을 어떻게 포기하지? 

여름의 남자도 그랬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너무 강렬해서 '이건 뭐지?!' 하게 만들었던, 만난 이후로 매일을 혼란스럽게 했던, 그 기억을 나는 결코 지우고 싶지가  않다. 내 손을 잡고 가 복숭아를 한 박스 사주던 일, 부엌에서 치즈를 썰던 모습 같은 것들을 포기하며 새로운 삶을 얻고 싶지가  않아. 어쩌면 새로운 삶에서는 더 나은, 더 아름다운, 더 뜨거운 것들이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가진 이 소중한  기억들을 포기하고 싶지가 않다. 

그러니 나는 까만 사과를 먹지 않고, 이 삶에서 지금처럼 이대로 늙어가겠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지금 사랑받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으면서, 그렇게 늙어가겠어. 까만 사과, 잘 가요… 까만 사과는  분명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는 상당히 좋은 역할을 할 것이다. 그들에게로 가라, 사과여. 내가 아니라 그게 꼭 필요한 다른  사람들에게로 가. 가서 네 역할을 다 하렴. 어딘가의 누군가는 반드시 네가 필요할 거야. 가라, 까만 사과여, 가라!!




작가의 이전글 다음 일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