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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Feb 04. 2021

별 것 아닌 일?

《밀크맨》

《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창비, 2019

여자는 열여덟 살이다. 길을 걸으며 책을 읽는 것이 그녀가 좋아하는 일인데 나중에야 그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인다는 걸 알게 된다. 여느 날처럼 걸으면서 책을 읽다가 '밀크맨'이 옆에 차를 대며 태워주겠다고 한다. 그녀는 거절했지만, 그  뒤로도 그는 예고도 없이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조깅을 하던 중이기도 했고 프랑스어 수업을 듣던 중이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말을 걸고 또 갑자기 사라진다. 그런 그녀는 신경 줄이 팽팽해진다. 외출을 하면서도 혹시 여기서 나타나지  않을까 저기서 나타나지 않을까 두리번거리고 겁을 먹게 되고, 그가 자신의 어쩌면-남자 친구(그러니까 확실한 남자 친구는 아니고  공식적인 관계도 아니지만 비슷한 관계)에게 자동차 폭발 사고가 일어난다고 암시하기까지 한 마당에 그녀는 두렵다.  어쩌면-남자 친구에게 운전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쩌면-남자 친구에게 그 말은 생뚱맞다. 그녀와 밀크맨이 함께 있는 그 잠깐 동안의  모습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그것은 부풀려져서 전해진다. 그녀는 그가 타라고 한 차에 탄 적도 없는데 그를 따로 만난 적도 한  번도 없는데 오히려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습적으로 그가 찾아올까 봐 두렵기까지 한데, 사람들은 그녀에게 유부남이면서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반정부 영웅인 그의 정부라고 소문을 낸다. 그녀의 엄마조차도 그가 영웅인 것이 멋져 보이겠지만 그러나 그의 세컨드가 되면  안 된다고 그녀에게 지청구를 늘어놓는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사람들의 귀에 닿지 않을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엄마가 하도  걱정하는 통에 엄마 그게 아니야, 나는 그의 애인이 아니야, 나는 그를 멋지게 생각하지도 않아, 그가 내가 같이 있는 모습이 왜  목격되었느냐면, 그가 갑자기 나를 그 자신이 원할 때에 찾아오기 때문이야, 우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말을  하고 엄마가 자신의 편이 되어주길 바랐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엄마는 그녀에게 '거짓말'이라고 화를 낸다. 엄마는 믿어야 하는  딸의 말을 믿는 대신 자신이 믿는 바를 확고히 한다. 그것이 설령 사실이 아닐지라도.



여자는  이 일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음을 안다. 어쩌면-남자 친구에게도 또한 가족에게도.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으로 여겨지리라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누가 너더러 길을 걸으면서 책을 읽으랬니, 그거 이상하다고 예전부터 말했잖아. 사람들은 네가  밀크맨과 관계있는 것보다 걸으면서 책을 읽는 걸 더 이상하게 생각해. 누가 너더러 프랑스어 공부하러 다니라고 했니, 조깅은 왜  혼자 나간 거니, 거기를 왜 혼자 걸었니 등등. 그녀는 그로 인해 두렵고 행동에 제약을 받고 이 모든 것 때문에 신경 줄이 팽팽해져  어쩌면-남자 친구와 다툼도 잦아진다. 그렇지만 만약 이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그녀의 경험부터 두려움까지 이해받지 못할뿐더러 축소될 것이 분명하다.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데? 그가 너를 때렸니?라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니까. 그러면 그가 너를 만졌니?라고 물어보면 또 '그건 아니야'라고 말해야 하니까.  그렇다면 대체 왜 그래. 뭐가 두려워, 뭐가 겁나, 왜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있는 거야,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그가 너를 만진  것도 아니라며, 라는 말들 앞에서 그녀는 뭐라 답할 수 있을 것인가. 분명 나는 그를 피하고 싶고 그를 만날까 봐 두렵고 집 밖으로  나서는 것도 걱정되고 집 안에서조차 혹시 그가 나를 보지 않을까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그러는 거야, 할 테니까.



서서히 피해자를 잠식해가는 가해자의  모습을 보는 건 피해자뿐이다. 오히려 가해자는 세상에 알려지길 정부에 반하는 영웅이다. 만약 이 상태 그대로 피해자가 '그  때문에 두렵다'라고 세상에 밝혔다면 '도대체 피해가 뭐기에 그러느냐, 그런 사소한 일로 한 남자의 인생을 망치지 말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것이 성폭행이냐, 네가 당한 건 희롱 축에도 못 끼지 않냐, 고 피해자도 아닌 제삼자들이 피해자가 당한 일의 경중을  재려들 것이다. 분명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것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네 피해의 전부이냐고, 그런 것을 성폭력으로  퉁칠 수 있냐고, 그것은 아니지 않냐고, 피해자가 아닌 제삼자들이 입을 모을 것이다. 그 남자가 세상을 위해 한 일이 있는데,  너 같은 여자와 단지 말을 섞었을 뿐인 것 가지고 성범죄자가 되어야겠냐고, 그것이 정말 너와, 네 가족과, 이 지역과, 이 나라를  위한 일이냐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가해자가 그녀를 만진 것도 아니니까, 때린 것도 아니니까, 성기를 삽입한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는 피해를 당한 건 아닌데 피해를 당했다고 호소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너는 한 남자의 인생을 바닥으로 내팽개치고 있다고,  그것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거냐는 비난의 말들이 피해자에게 쏟아질 테니까, 그녀는 침묵한다. 침묵은 그녀를 약하게 만들고 침묵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차에 타게 만든다. 아무런 약속 없이 불쑥 나타났던 가해자는 이제 그녀와 약속하고 만나는 사이로 성큼 자리할 수  있게 된다. 어떤 피해는 대의를 위해 눈감아야 하는가? 한 여성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면서 좇아도 되는 대의라는 게 있는 건가?


좆같아 진짜...




'애나  번스'의 밀크맨은 한 피해자가 어떻게 가해자에게 휩쓸려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다는 건 실제 피해가 존재했다는 걸  의미한다. 피해자는 고립되고 그녀는 서서히 기운이 달리고 있다. 그것이 이 이야기를 중심에서 잡아나가면서 그러나 소설  밀크맨은 한 늙은 남자가 한 어린 여자에게 접근해 자기 뜻대로 하려는 것만 보여주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제 있는 여자들이라 불리는  페미니스트들과 사람들에 대한 감시와 부풀려지는 소문들과 이루지 못한 사랑과 드러내면 안 되는 사랑까지 다 담겨있다. 문체도 특이하고  내용은 탄탄하다. 때로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는 작품들을 읽노라면 작가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욕심을 부렸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애나 번스에 대해서라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이야기들을 이렇게 자연스레 녹여낼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 나는  밀크맨을 한 번 더 읽을 것이다. 



소설의 처음부터 애나 번스는 밀크맨을 죽이고 시작한다. 그 점이 고마웠다. 내가 죽이고 싶었는데 이미 죽여줘서 고마웠다. 때로 작가들은 이런 식으로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런 식으로 일이 이루어졌다. 밀크맨이 아주 조금씩 접근하고 잠식하고 육식동물처럼 슬금슬금 다가왔기 때문에 뚜렷하게 집어 말하기가  힘들었다.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 어쩌면, 어쩌면 아닌지도, 아마도, 모르겠다. 계속적인 암시, 상징, 재현, 은유가  있었다. 내가 받아들인 의미가 그가 의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밀크맨이 한 말을 액면 그대로 놓고 보거나 각  사건을 따로 떼어 묘사한다고 해보자. 아무리 애써 말로 전달해봤자 별것 아닌 일이 될 것 같았다.-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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