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나아지는 감각
#도와달란말이뭐그리어렵나
#아침에손아귀힘이없는자의슬픔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저마다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지점이 있다. 더구나 혼자 살다 보면 그런 상황을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래서 독거노인들은 이웃 친구가 절실하고, 필요할 때 연락하면 달려와줄 친구가 필수적이다. 가령, 그 전날 사둔 토마토소스병을 냉장고에서 꺼내 손에 쥐는 순간 아침부터 ‘X 됐다’는 것을 느낄 때. 전날 밤부터 토마토소스 스파게티가 너무너무 먹고 싶었는데 병을 열지 못해 먹을 수 없게 됐을 때. 고무장갑을 끼고, 뜨거운 물을 부어봐도… 꽉 다문 병뚜껑이 내게 힘을 풀지 않을 때. 나는 너무너무 화가 나고 억울하고 눈물까지 핑 돈다. 이게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없길 바란다. 실제로 어디선가 경품으로 받은 무겁고 후진 접이식 자전거를 내 완력으로 접지를 못해 집 앞에서 30분 가량 힘은 힘대로 다 쓰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나동그라졌을 때, 그래서 그 당시 제일 가까웠던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야만 했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이사를 해야 할 때, 쓰던 컴퓨터나 모니터가 갑자기 안 켜지거나 돌아가지 않을 때, 잘 되던 집 와이파이가 여행을 다녀오니 연결이 되지 않을 때, 무거운 택배 상자를 옮겨야 할 때, 갑자기 몸이 크게 아플 때, 중년의 남자 집주인이 질척대다 못해 아침 저녁으로 달라붙을 때. 앞에 나열한 이 숱한 순간들이, 외국에 나와 지내는 이 몇 년 동안, 내가 혼자여서 가장 분통 터졌던 때이다.
한번은, 급성장염이었는지 방 화장실에서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다 혼절을 한 적이 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지 족히 한 시간은 지났을까. 정신이 들어 깨보니 내가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어느덧 구토와 설사는 멈췄고, 화장실에서 방 침대까지 어떻게 기어 왔는지 무슨 힘으로 왔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났다. 순간, 살았구나 싶었다. 당시에는 전화로 구조요청을 할 힘도, 정신도 없었던 나는 겨우 기력을 차리고, 친구에게 연락했다. 그제야 친구와 같이 병원 응급실에 갈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한국에 잠시 들어와 갑자기 수술을 하게 된 적이 있다. 나는 이 사실을 주변은 물론 부모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당일 혼자 병원 수술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보호자 없이 혼자 온 내게, 보호자와 통화가 되어야만 수술을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싱글 여성은 수술을 하려 해도 남길 보호자 번호가 마땅치 않다. 연로하신 부모나 가족에게 수술이나 병 사실을 숨기기가 쉽지가 않다. 마침 회의에 들어간 오빠는 의사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나는 오빠가 회의를 끝마칠 때까지 차가운 수술대에 누워 기다려야 했다.
혼자가 되고 나서는, ‘혼자서도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늘 따라다녔다. 남에게 기대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야 한다. 나약해져서는 안 된다. 뭐든지 혼자 할 줄 알아야 한다, 스스로 최면을 걸어왔다. 기계를 잘 모르지만, 밤을 새워서라도 컴퓨터나 모니터, 와이파이 정도는 혼자 손볼 줄 알아야 했고, 손아귀에 힘이 잘 안 들어가는 아침 시간을 대비해 애초부터 병뚜껑이 잘 열리게 병 주변을 깨끗이 닦아두고, 꽉 잠가두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완력을 써야 하는 일은 도구를 이용하는 것으로 최대한 해결했다.
남자들과의 관계에서도,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확실히 보이는 이들과 주로 친해졌다. 모자람이 없는 남자는, 내가 뭘 줘야 할지 몰라 가까이 가지를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름의 생존 방식이었겠지만,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오기를 부렸던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나는 충분히 독립적인 인간이었고 더 강해질 필요가 없었는데. 그저, 내가 지금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남들에게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웠을 뿐인데.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고, 도움을 받는 것이 어색해서 그랬다.
그러다 보니 남들도 나를 오해하기 시작했다. 얘는 뭐든 잘하고 자신만만하고 능숙하며, 어떤 도움도 필요치 않은 사람인 줄로 아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엄마나 누나가 필요한) 연하, (상대가 먼저 말을 걸고 무언가를 하자고 제안해주길 원하는) 극 인트로버트들,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거나 인생 상담이 필요한 부류들의 남자들만 가득했다. 나의 필요를 알아채고 채워주는 이가 아주 적었다.
사실 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완벽한 합을 무척 좋아한다. 각자 완벽한 사람이 아니지만, 정확히 절반에 가까운 자기 몫을 해서 둘이 함께일 때 완전해지는 관계. 내가 이걸 맡아서 하면 상대가 저걸 맡아서 하고, 내가 상대의 이런 면을 돌봐주면, 상대는 나의 이런 면을 끌어주는 그런 반쪽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것과 반대의 시그널을 남자들에게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맘 속으로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다른 ‘허튼소리’를 해대는 인간들을 보며, 말을 안 하면 대체 상대방이 어떻게 알아먹으라는 거냐며 기가 찬다고 분개했는데, 그 TV 드라마 속 고구마 백 개 먹은 캐릭터가 실은 바로 나였던 것이다.
한때, 강해 보이고 싶은 오기도 부릴 수 없던, 바닥인 시기가 있었다. 오랜 유학 생활로, 통장 잔고는 바닥이 났고, 사람으로 인해 몸도 마음도 온전치 못하고 너덜너덜하던 때였다. 에너지가 없어 남에게 내 어려움과 필요를 설명하는 수고도 들이지 못하던 그때, 말하지 않아도 헤아리고 채워주던 친구가 있었다. 나이 먹고 사회에서 만난 사이의 남자 사람을, 선뜻 ‘친구’라고 부르기 망설여지는 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친구’가 아니면 그 사람을 도대체 뭐라 부를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도 오랜 해외 생활 중이었고, 친구가 많지 않았다. 워낙 바빠 몇 개월에 한 번이나 볼까 하는 그런 띄엄띄엄한 사이였는데, 한번 만나면 대화가 얕지 않았다. 안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헤어지며 ‘이렇게 즐거운 대화가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고 했던 그의 말이 꽤 의외였던 기억이 선하다. 그날의 대화가 나로선 캐주얼한 편이었기 때문에. 남자들은 혼자 외국에서 대화 나눌 친구도 없이 이리 오래 버텨도 괜찮은가 싶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맥주를 곁들이며 긴긴 대화를 하고, 헤어지는 길이었다. 횡단보도에서 안녕 인사를 하려는데, 그가 내 손에 황급히 봉투 하나를 쥐어주고는 뛰어가버렸다. 잘 쓰라는 말 한마디만 등 뒤로 남기고. 이 정도로 안 친한 남자 사람에게 봉투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혼란스러웠고 또 당황스러웠다. 봉투를 손에 쥔 채, 그 밤거리에서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올려다봤던 하늘의 달을 지금도 기억한다. 돈을 받고 나니 우리의 관계를 검토해보게 되었다. 우리가 무슨 사이이길래 그는 나에게 돈을 주는가.
날이 밝자마자 연락해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돈이냐고, 무슨 의미냐고. 그는, 자기도 힘들었던 적이 있다고, 많은 사람들 도움으로 유학을 마쳤었다고,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 사람 눈에는 내가 안쓰러워 보이는구나. 그에겐 내가 도움이 필요한 게, 힘들어하는 게 보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게, 이 사람 눈에는 보인다는 게 신기했다. 그를 만나는 동안, 나는 나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그냥 편안히 있기만 해도 되는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됐다. 상대에게 많은 걸 맡겨 두어도 되었고, 온전히 보살핌을 받는구나 느끼는 순간들이 있었다. 있는 그대로 약한 채로, 기대도 되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안심이었다. 사려 깊고, 속이 깊은 이였다.
나는 여전히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홀로 살아갈 것인지 답이 없다. 하지만, 세 가지 면에서 나는 마음이 편하다. 첫째, 당신만 혼자가 아니다. 나뿐 아니라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이다. 둘째, 생각보다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당신이 요청을 하기만 하면. 셋째, 내가 이곳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 호의를 입고 위로를 받았던 것이 예상했던, 혹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 만큼, 이후로 나는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 같이 살아갈지 모른다. 언제가부터 나는 '불확실성'이라는 말을 애용하고 있다.나는 삶의 불확실성을 껴안기로 했다. 삶은 확실히 불확실하다. 그러니 불확실성을 불안으로 느끼지 않는 것만이 내게 구원이 된다. 이런 삶의 불확실성을 무한한 가능성으로 품는 것이 내가 외국에 나와 혼자 살아가며 가장 많이 하는 생각 연습이자,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이다.
p.s: 늦은 나이에 외국에 나와 공부하다 보니, 내가 용돈을 드려도 모자랄 판국에, 가끔 가족, 친척, 지인으로부터 돈을 받는 경우가 생긴다. 그때마다 마음이 아주 사방팔방으로 분열된다.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떤 표정이 되어야 하나. 나는 대체 언제 돈을 벌어 이걸 갚을 수 있을까.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아사리판을 벌이는 것이다. 하지만 돈을 내게 주는 마음도, 그걸 받는 것도 모두 용기라 생각하고 이후로 넙죽 받고 있다. 다시 정규직 일자리가 생겨 매달 고정 수입이 통장에 꽂힐 때까지는 이 방침을 고수할 생각이다. 물론, 받은 돈의 정확한 액수는 적지 않지만, 감사한 분들, 경제적 도움을 받은 분들을 비밀 노트에 리스트로 빼먹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내가 돈을 너무 넙죽 받는 후안무치의 인간이라 생각지 말아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