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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디에도 없는 사람 Nov 11. 2021

목적도 거래도 없이 같이 가주는 것

#가끔은바보인척해도좋아

#청춘영화재질


그냥 같이 따라가는 것. 혹은 가 ‘주는’ 것.
간다는 행위의 조건 없는 증여.
딱히 임무가 없었지만 가면 할 일이 생기기도 하는 것.
어찌할 도리는 없으나 그냥 옆에 앉아 있는 것.
이 무위의 동행은 일상을 분 단위로 쪼개 생산성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가장 어려운 과업인지 모른다.
시간 낭비이자 간섭으로 간주된다.

은유 <나, 다니엘 블레이크 따라 하기> 중에서[1]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낭비한다. “너 길 잘 모르니까 같이 가줄게.” “밤이 늦었으니 데려다줄게.” “혼자 할 수 있겠어? 같이 가자.”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 누군가에게 마음이 기울었을 때 절로 나오는 말들이다. 같이 가준다는 거. 그게 참 고마운 일이라는 걸 혼자가 된 사람들은 안다.


어학연수를 갔던 첫 해 초반 6개월 동안 나는 친구가 없었다. 일상을 공유하는 이가 없음에도, 제법 잘 지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야무지게 먹고, 학교에 가 수업을 들었고, 수업 후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숙제를 하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대사를 외웠고, 집에 가기 전 학교 수영장에 들러 매일 1,000미터씩 수영을 했다. 저녁을 사 먹거나 집에 와 해먹고 나서는, 책을 읽거나 집안일을 했다. 정해진 시간에 자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났다. 잠은 푹 잤고, 꾸준한 운동으로 매일 몸 상태는 최고였다. 다만,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이 없었고, 늘 밥을 혼자 먹는 게 아쉬웠다.


세 번째 학기에 들어서 친구랄 만한 사람들을 조금씩 만났고, 조금씩 이 도시에서의 생활도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세 번째 학기가 끝나가던 그날에도, 수업을 듣는 학교 건물 앞 카페에서 혼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때 카페에 들른 T가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T는 두 번째 학기에 수업을 같이 들었던 미국 남학생. 잘 지내냐며, 다음 학기에 무슨 수업 들을 거냐고 물어왔다. 왜 어린 남자들은 이토록 자기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걸까. 그 사이에 얼굴이 왜 이렇게 하얘졌느냐니 헛소리를 하며 눈빛으로 과도한 호감을 뿜뿜 하고 있었다. 이런 T가 부담스러울 만도 했지만, 친구가 고픈 나는 그것도 반가웠다. 그 당시 T는 어학당에 이미 1년 반을 넘게 다니고 있었다. 같은 반이던 그 학기 내내 밥 한 번 같이 먹지 않았던 우리가 그래도 이렇게 지금 몇 마디 대화라도 나누는 건, 다 컨딩墾丁[2] 때문이다.


나는 그 당시 컨딩이 배경인 드라마로 공부 중이었고 그 드라마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런 이유로 컨딩에 꼭 가보고 싶었고, 여행 한번 못하고 이곳의 여름이 이대로 지나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혼자도 여행을 갈 수 있었지만, 컨딩은 혼자 갈 만한 여행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여행을 못 가는 건 말이 안 된다. 같이 갈 사람을 찾자.  


하루는 수업이 끝나고, 늘 단짝으로 붙어 다니는 같은 반 미국 남자 애 두 명한테 말을 걸었다. ‘너네 컨딩 여행 안 갈래?’ 이럴 땐 혼자보다 두 명 세트가 공략하기 좋다. 제안할 당시 속으로 얘네가 오케이 할 확률이 반반이라고 생각했다. 몇 마디 더 내게 물어보더니, 의외로 그 자리에서 좋다는 답이 나왔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 나는 그중 유태인 친구랑 종종 만났다. 굉장히 똑똑한 아이였고, 대화의 주제가 폭넓었다. 음악과 미술에 대한 취향도 잘 맞아서, 같이 차를 마시고 전시회나 영화를 보러 다녔다. 하지만 T랑은 그 후 전혀 교류가 없던 터였다. 그날 아침 카페에서의 만남을 계기로 연락을 이어가던 우리는 네 번째 학기에 같은 반이 되었고, 아쉽게 유태인 친구는 경쟁률이 심했던 우리 반에 합류하지 못했다.


네 번째 학기를 지내는 동안 봇물 터진 듯 굉장히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매일 밥을 먹는 무리가 생겼고, 외로웠던 지난 9개월을 상쇄할 만큼 압축적으로 많은 감정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T도 있었다.


T는 나랑 16살 차이인 갓 스무 살이었다. 캘리포니아 출신인 이 아이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이곳에 와 언어를 배우고 있었다. 매일 검은 비닐 ‘잠바떼기’를 걸치고 다니고 머리도 한화 4천 원 짜리 미용실 가서 자르는 이 아이는, 나중에 알고 보니 집안이 굉장히 큰 가구 사업을 하고 있었고, 자기네 공장이 대부분 중국에 있다 보니 사업을 위해 중국어를 배우고 있는 거였다. 말로는 여자들이 돈 보고 자기 만날까 봐 일부러 거지 같이 입고 다니는 거라고 했는데, 당시에는 그 말이 기도 안 찼다.


같이 지내다 보니 미국 명문대를 졸업한 유태인 친구와는 또 다른 방면에서 탁월한 면이 보였다. T는 비록 경험 폭이 넓지 않고 유식하지는 않았으나, 숫자에 대한 감각이 탁월했고, 장사 머리가 뛰어났다.


나는 평생 왜인지 모르게, 주변에 내성적인 남자애들이 잘 꼬였다. 이 내성적인 남자애들은 곧잘 내가 자신들과 잘 통한다고 생각했고, 내가 자신들을 알아준다고 생각하곤 했다. 나도 그들이 나와 있을 때만 보여주는 반전 매력이나 귀여운 모습을 좋아했기 때문에, 내성적인 아이들의 마음 문 여는 것을 즐겼다. T 역시 그런 부류였는데 (나중에 다투고 난 다음날 며칠 빼고는) 수업 내내 늘 내 옆자리에 와 앉았고, 밥도 매일 같이 먹었다. 낯선 친구들 앞에선 입을 다물거나 동공이 흔들리고 심지어 말을 더듬기도 했지만, 나랑 있을 땐 그보다 더 장난스럽고 유머러스한 사람이 없었다.


T는 스물이라는 나이에 걸맞게 순수하고 밝았고, 또 불안했다. 언젠가 수업이 끝나고 그 아이 머리를 자르는 데 같이 간 적이 있다. 자전거로 통학을 하는 그 아이의 자전거 뒤에 앉아 미용실까지 갔다. 자주 지나다니던 길였음에도 그 아이 자전거의 뒷자리에 앉아 보는 거리 풍경은 처음 온 동네처럼 새롭고 가로수들이 유독 싱그러웠다. 누군가와 뭔가를 같이 할 수 있는 게 무척 좋았다.


이 친구의 또 다른 꿈은 가수였는데, 밤이면 자신이 만든 노래를 직접 기타를 치고 불러서 보내왔다. 솔직히 말하면 그 아이는 음치였지만, 작곡 솜씨와 기타 연주 는 매번 들어도 좋았다. 잠자리에 들 무렵, 도착하는 그의 노래 편지가 어느덧 한 달쯤 쌓여가던 즈음이었다.


T는 점점 나와의 관계에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관계에서 다수보다 소수의 사람들에 집중하고, 많은 사람을 두루 아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이들과 깊이 알기를 원한다. 아마 내가 추구하는 이 인간관계의 깊이가 스무 살의 T에게는 버거웠거나 그로 인해 오해를 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T를 특별하게 생각하거나, 그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에게 너무 어려운 과제를 준 꼴이 되었다.


나와의 적정 거리를 찾지 못하고, 혼자 난기류를 겪는 T. 그날은 낮에도 기타 연주를 연거푸 보내오더니 메시지 말미에 ‘너 나 좋아해 줄 거야?’라고 물었다. 또 하루는 도서관에서 옆자리에 앉아 숙제를 하던 중에, 돌연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붙어 다닐 수는 없잖아!” 나로선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하는 그 유명한 드라마 대사보다 어이없고, 맥락이 없었다. 내가 멀리 가려하면 T는 강아지처럼 좇아왔고, 연락을 끊고 거리를 두면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연락을 해왔다.


이곳에서 20대 친구들을 만나면서 나이 차이를 인식할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가끔 내가 스무 살 무렵에 가졌던 미성숙함이나 불안, 자신 없음, 유치한 허세나 열등감을 이때의 친구들에게서 발견할 때면 자연스레 우리의 격차를 느끼곤 했다. 하지만 어리다고 배울 게 없다거나 친구로서 더 매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투명 어항처럼, 투명한 물고기처럼 자기 속이 훤히 보이는 스무 살의 친구 T를 나는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가 나에게 보여준 순수한 감정들, 표현들, 그 기복마저 내게는 가치 있는 경험이었다. 20대의 나를 다시 보는 듯했고, 상대의 기복을 여유롭게 받아줄 수 있는 30대의 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를 좋아하고 또 미워하고, 뒤흔들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던 그 아이가, 귀국 날짜가 정해지자 조금 달라졌다.


귀국 날짜가 정해지면 누구나 시간이 모자라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한정된 시간 안에 가야 할 곳도, 만나야 할 사람도 많기 때문에 해야 할 일과 만날 사람의 우선순위를 정하기 마련이다. 이 아이는 그 시간 동안 뭐든지 해주고 싶어 했고, 어디든 같이 가주려 했다. 그때 마침 예전 한국에서 아는 후배가 출장 차 내가 있는 이 도시에 왔다. 그 후배가 머무는 호텔에서 만나기로 해 초행길인 동네를 가야 했다. 시 중심에서 거리가 있었고, 지하철을 타고 가서 버스를 갈아타고, 또 도보로 찾아가야 했다.


“너 길 바보잖아. 길 잘 못 찾으니까 내가 같이 가줄게.”


내가 길을   찾아.  완전 인간 내비인데.   길을 데려다주고 다시 혼자 되돌아가야 하는데도,  같이 가겠다는  그러라 했다. 그날 후배의 호텔 로비까지 T 같이 왔다. 로비에서 결국  명이 마주치게 되어 인사를 했다. 이쪽은 한국에서  후배 30, 양복 차림 회사원, 어른 남자 느낌 뿜뿜. 이쪽은  미국 친구, 스무 , 청바지에 티쪼가리, 청춘 느낌 뿜뿜.   남자가 서로를 스캔하는 눈빛 속에 나는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내가 빠져나온 현실과 현재 처해 있는 현실의 간극을 느꼈다.


T가 귀국하기 전날 밤, 나를 데려다주고 집 근처 지하철역 플랫폼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길게 나누었다. 그는 주위에 지나는 많은 사람들을 아랑곳도 하지 않고, 눈물을 닦으며 긴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내 낌새만 비출 뿐 그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그날은 다 들려주었다. T는 다음날 어색한 포옹 후 비행기에 올랐다. 나는 30대 후반에 외국에 나와 공부하면서, 20대에 그때 미처 못했던 걸 하게 되는 등 그 시절을 다시 사는 느낌을 종종 받았는데 그 경험의 가장 큰 지분은 T에게 있지 싶다.


      

[1]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779625.html#csidx2f2d5584d5143f1896d833598a59b17


[2] 대만 섬 최남단에 위치한 휴양관광도시. 백사장과 푸른 바다가 아름다워 전형적인 남국 해변의 모습을 보여준다. 1년 내내 찾는 휴가객들로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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