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벽>, SF 보다 Vol. 2, 문학과 지성사
사람의 역사는 벽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절벽과 협곡이 있고서 사람이 있었고, 사람은 그 벽 위에 그림을 그리며 선조의 유산을 전했다. 농업 혁명이 일어나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은 이윽고 벽을 짓기 시작했다. 흙벽이 돌벽이 되고, 돌벽이 철벽으로 변하는 사이 도시는 자랐고 국가는 생멸했다. 인류사 몇 천 년간 사람은 얼마나 많은 벽들을 세워왔을까? 건물 밖도, 안도 우리는 벽으로 가득 찬 세계에 산다. 여러 벽들의 조합인 건축물은 말할 것도 없고, 인기 있는 인테리어 아이템인 '가벽'이라든가, 회사원과 회사원 사이를 가르는 '파티션'만 생각해도, 벽에 대한 우리 종의 애호는 아주 각별하다.
벽은 물리 영역 바깥에도 있다. 우리는 마음에도 벽을 세운다. 그 마음의 벽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고, 내 집단과 타 집단에 차이를 둔다. 관념의 영역을 살펴보면, 그곳에도 역시 벽이 있다. 이 관념적인 벽은 어떤 개념과 개념 사이를 구분 짓고 분류하거나 그것의 한계를 규정한다.
벽은 우리 삶에 이토록 많다. 그만큼 그것에 부여되는 의미 또한 다양하다. 우리가 흔히 쓰는 관용 표현 몇 가지를 보자. '벽을 쌓다'는 서로 사귀던 관계를 끊는다는 뜻이고, '벽에 부딪치다'라는 말은 장애물에 부딪히는 것을 말한다. 또 한편으로 '벽을 깨다 [넘다]'는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일컬을 때 사용한다. 이 몇 개만 보더라도 벽은 상황에 따라'단절'과 '장애물', '문제'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표준국어 대사전에서의 '벽 5'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러한 추론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명사
1. 집이나 방 따위의 둘레를 막은 수직 건조물.
2.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나 장애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3. 관계나 교류의 단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4. 둘레를 형성하거나 공간을 규정하는 수직의 구조나 골조(骨組).
이런 점을 보았을 때 벽은 양가적인 가치를 가진다. 벽은 우리가 비를 피하고 우리 개인의 공간을 제공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의 한계나 장애, 단절을 야기하기도 한다. 실제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실제 하지 않기도 한 이 '벽'이라는 개념은 그만큼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문학과 지성사의 SF 단편 모음집 시리즈, 'SF 보다'의 두 번째 간행물인 <벽>은 이러한 벽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개성 넘치는 작가적 상상력 위에 풀어낸다.
듀나의 <아레나>, 이서영, <월담하려다 접천>, 이산화의 <깡총>에서의 벽은 통제와 차단 기능을 하는 벽을 소재로 한다. 전자의 두 작품은 벽으로 포위된 미래 한국 사회를 그린다. 듀나의 <아레나>에서는 미지의 생태계 '프로스페로'의 발견으로 야기된 '적사병'으로 인구의 3분의 1이 죽고 국가는 세계로부터 물리적으로 단절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그 여파로 에너지와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법을 배웠고, 재앙이 낳은 초능력자들의 활약은 일종의 스포츠가 되어 세계적인 인기를 얻는다. 재앙이 풍요를 낳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진보에도 불구하고 이 미래 한국은 고루하다. 자본의 논리는 여전히 생생하며 위선과 가장, 거짓과 은폐는 자리를 비우는 법이 없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사람은 무력해지며 이상은 빛을 잃는다.
<월담하려다 접천>은 그보다 한층 전체주의적인 사회를 그린다. 재앙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벽을 세운 미래의 서울인들은 서울 바깥은커녕 좀처럼 자신이 살던 동네도 벗어나는 법이 없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으나 그것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철저히 고립되고 통제되어 있다. 주인공은 그러한 상황을 먼저 깨달은 친구 '현정'의 인도에 따라 금지된 '인터넷'이란 것에 접속하고 어느 낯선 차원의 세계를 모험하면서 자신의 살던 곳의 부조리를 깨닫는다. 이 부조리와 통제의 자손은 안락한 벽을 뛰어넘고 시간의 질서를 어지럽힘으로써 어그러진 세계를 바로 잡는데, 이러한 세계의 회복이 지극히 평범한 이의 과격한 결단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인상 깊다. 이 소설에서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SF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불교적 은유들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가령, 주인공이 마주친 '아린'이라는 존재는 질병으로부터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약사불'을 연상케 하며, 황금색 피부에 팔 여덟 개가 달렸다는 외관 묘사는 초자연적 위험으로부터 세계를 수호하는 티베트 불교의 보살 '시따빠뜨라'를 떠올리게 한다.
이산화의 <깡총>은 자연선택의 결과로 시공간을 뛰어넘도록 진화한 토끼 떼와 그 토끼를 막기 위해 세운 벽에 대해 논한다. 인류의 총탄을 피해 시공간의 축을 뛰어넘게 된 토끼들은 그 기상천외한 능력을 제외하면 평범한 굴토끼에 불과하지만, 인류의 식량을 먹어치우고 마침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재앙 그 자체가 된다. 인류는 재앙을 막기 위해 벽을 세우고 사냥꾼을 고용하지만 토끼들은 그것마저 피해 갔고, 마침내는 시간의 벽도 뛰어넘어 역사를 바꾸었고, 결과적으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지위마저 전복시키고 만다. 정작 토끼는 무엇도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아밀의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과 이유리의 <무너뜨리기>는 비물질적인 벽의 이야기를 그린다. 전자에서는 차원의 마녀와의 계약을 통해 두 손을 4차원의 영역에 도달하게 함으로써 한계를 벗어나고자 한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그 대가로 '3차원의 세계에서만 살았을 때 얻었을 모든 가능성'을 팔았고, 왼손과 오른손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게 된 그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거듭난다. 그러나 4차원의 존재가 된 나윤은 보통의 3차원 세계에서 지극히 고독하다.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여전히 음악을 했지만 그는 그 좋아하던 음악에 신물이 난다. 그는 4차원의 존재가 되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넘어설 수 없는 '천장'이 있었다. 3차원의 세계에서 으레 다른 동양인 여성 혹은 그 밖의 소수자들이 숱하게 마주하는 바로 그것이.
<무너뜨리기>에서는 마음속의 벽이 나온다. 서로가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사이가 소원해진 한 부부는 '리빌딩'이라는 일종의 최면 프로그램을 통해 서로 간의 마음의 '벽'을 쌓는다. 가장 일상적이던 대상을 '낯설게 봄'으로써 둘은 온전히 분리되었고, 그간 잊었던 새로움과 설렘을 되찾는다. 그러나 사람이 마음의 벽을 쌓는다는 것은 편하고 가뿐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래 쌓은 신뢰와 이해는 불투명해지고, 안정 대신 불안이 싹튼다. 잃은 것을 추억하며 쌓아 올린 벽은 도리어 지금껏 쌓아 올린 다른 무언가를 상실케 한다. 주인공 부부는 강도의 칼날 앞에서야 그것을 깨닫는다.
정보라의 <무르무란>은 초현실적 존재가 실제 하는 어느 판타적 세계의 부족 이야기를 다룬다. 이곳의 벽은 지식을 전승하는 터전 그 자체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사건들을 벽에 기록한다. 그날의 사냥감, 왁자한 축제, 어느 의례의 절차와 비밀을 새겨 넣는다. 그로써 후손에게 그들이 터득한 바를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식은 일부만이 향유할 수 있다. 사냥에 능하고 손재주가 좋으며 주변 사람에게 좋은 평을 얻는 사람만이 그 벽에 그림을 그리고 기호를 아로 새길 수 있다. 그럴만한 능력이 없거나 다쳐서 사회에 기여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도태된다. 외면받는다. 잊힌다. 그들의 삶은 벽에 기록되지 못한다. 그렇게 죽은 몇몇은 죽은 후에도 '무르무란'이라는 죽음을 먹는 새에게 먹혀 다시금 세상으로부터 사라진다. 강한 이만이 살아남는 세계에서 소수자와 약자는 기억되지 못하는 것이다.
SF 보다 vol.2 <벽>은 '벽'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토록 다양한 해석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지금껏 벽에 대해 그다지 대단한 생각을 가져본 일이 없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그토록 아늑하던 내 책상 주변의 파티션이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왜일까? 어쩌면 나는 글을 마무리 짓고 귀가하는 길에 마주치는 숱한 벽들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감상을 늘어놓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써 내려간 것은 내용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나의 해석에 불과하므로 독자 여러분은 부디 이 멋진 책을 읽고 또 다른 감상과 해석을 나눠주길 바란다. 이 벽 너머에, 다채로운 세상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