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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me May 09. 2021

과거와 현재의 나를 기억해 줄 사람들

#12월 24일에 시작된 만남

누군가 과거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귓가에 속삭인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학생의 어느 때라고 답할 것이다. 분명 당시만의 고충이 스멀스멀 떠오르겠지만, 계산적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은 유일한 시기라고 자신하기 때문에 좋다. 모든 기억은 조금씩 미화가 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냉혹한 현실을 매일 마주하는 지금보다는 낫지 않을까, 라고 위안한다.

 

나에게는 십 년이 넘게 유지되는 모임 하나가 있다. 대학교 선배와 동기로 이뤄진 네 명의 커뮤니티인데, 지금 생각하면 시작이 묘했다. 한 학번 선배와 동기가 나와 무척 친했는데, 그들은 세 학번 선배와 유대가 깊었다. 어느 순간 내가 그 셋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 간간이 참여했고, 그렇게 정기적인 모임이 잦아졌다.


결정적으로 친해지게 된 계기는 2013년 12월 24일에 벌어졌다. 연인이 있는 사람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우리는 술자리를 가졌다. 세 학번 선배와 나는 당시 각각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가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임을 성사시켰다. 이후로 우리는 몇 년 간 12월 24일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만남을 약속했고 시간을 함께 보냈다.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다른 약속을 잡는 건 의리를 저버리는 행동이라며 핀잔하기도 했다. 만약 연인이 있다면, 그날 모임에 데려오라고 서로에게 돌을 던졌다. 보통 우리는 충정로에서 만났다. 그곳은 세 학번 선배의 자택 근처였고, 선배만이 아는 맛집을 아무것도 모르는 세 명의 후배가 졸래졸래 따라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우리는 충정로를 ‘성지’라고 부른다. 이제는 모두가 서른이 훌쩍 넘어, 알 만한 걸 다 아는 나이가 됐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충정로에서 만나고, 세 학번 선배가 선택한 노포로 걸어갔다. 이제는 모두의 기억이 서려있는 장소이기도 해서 묘한 감정이 든다. 가끔 충정로를 지나갈 일이 생기면, 친숙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쿵쾅거린다.



최근 우리는 충정로에 위치한 레지던스에서 음식을 직접 해 먹고, 술을 마셨다. 십 년 만에 처음 성사된 특별한 경험이었지만,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철없었던 이십 대의 기억 소환이었다.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실패했던 연애 경험을 비롯한 ‘흑역사’가 대부분이다. 나의 이야기 중 하나는 여전히 그들의 먹잇감이다. 군대를 전역하고, 겁 없이 후배에게 고백했다 차인 슬픈 사연이다. 다소 재미있는 점은 지금의 이야기처럼 걱정해준다는 사실이다.


굳이 각자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의 고충을 이야깃거리로 꺼내지 않는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서이다. 나는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건네는 이들과의 만남으로 현실을 이겨낸다. 과거의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이들은 나의 현재도 기억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폭풍과도 같았던 레지던스에서의 술자리가 끝났고, 이튿날 세 학번 선배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우리의 만남을 이렇게 정리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철없었고 웃음 많았던 이십 대를 소환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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