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휘 Oct 29. 2023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불편

가치를 위해 불편함을 선택할 수 있을까

어느 날, 카카오 메이커스에서 알림톡이 왔다. <새가버치>라는 새활용 프로젝트 참여자를 모집하는 내용이었다. 2기는 의류 수거였는데, 신청하면 상자를 보내 주고 여기에 면 100%인 티셔츠와 셔츠를 모아서 보내면, 수거해 가서 양말로 생산한다고 했다. 이런 류의 새활용에 관심이 많은 터라, 해봐야지 하고 냉큼 신청했다. 


내 옷만으로는 상자를 채울 수 없어서, 회사와 주변에도 안내를 했다. 옷을 가져다 주시는 분들께는 직접 만든 작은 선물도 드렸다. 많이 모이지는 않았지만, 몇 분이 집에서 헌 옷을 가져다주셨다. 그렇게 모인 옷이 열 벌 쯤. 


얼마 뒤, 집에 택배 상자가 도착했다. 상자도 큰 종이 봉투에 담겨져 왔고, <새가버치> 프로그램에 대한 안내지가 함께 들어 있었다. 상자는 테이프를 사용하지 않고 접어서 닫을 수 있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테이프를 사용하지 않고 접어서 바로 수거 가능한 박스


티셔츠를 그냥 넣으면 안 되고, 재활용이 어려운 부분은 제거하고 넣어 달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면과는 다른 재질 그러니까 티셔츠의 코팅 프린트 부분, 장식 부분 등은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셔츠의 단추 부분, 티셔츠의 목 부분도 제거해야 한단다. 

모아진 티셔츠.  활용할 수 없다는 목 부분과, 프린트 부분을 하나 하나 잘라냈다


모아진 옷을 펼쳐놓고 재활용이 어렵다는 부분을 하나 하나 가위로 잘라냈다. ‘재활용은 번거로운 법이지’, 하며. 프린트를 오리고, 목둘레를 잘라 내고, 단추 부분을 다 잘랐다. 면 부분만 남은 옷을 상자에 차곡차곡 넣었다. 약간은 번거롭지만, 그래도 내가 옷을 보내는 것만으로 참여가 된다니 고마운 노릇이다. 이렇게 손쉽게 참여할 수 있다니.


상자를 가득 채웠으면 좋았을텐데 열 벌로는 상자가 그다지 차지 않았다. 그래도 일정에 맞춰야 하니 모여진 대로 상자를 봉해서 회수 신청을 했다. 그 뒤로 사업 진행에 대한 알림톡이 몇 번 더 왔고, 면 양말로 다시 태어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다음 다운(베개, 패딩, 이불 등) 모으기도 참여했는데, 지인들에게 부탁했더니 한 분은 가족들의 낡은 패딩을 모아 한 짐 무겁게 이고지고 우리 동네까지 지하철을 타고 갖다주셨다.

이때는 종이 상자 대신 재사용 가능한 가방이 왔다.


 

다운은 버리기도 번거롭고, 침구로 재활용한다기에 신청!


모아진 다운(패딩, 베개) . 이번에는 상자대신 가방에 넣어 보내라고 해서 꽉 채워 보냈다. 


이 작은 활동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재활용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자원을 모아야 하고, 재활용 가능하게 손질해야 하고, 그걸 수거 센터에 보내야 하고, 선별장에서 다시 물품을 확인하고 선별하고, 마침내 원재료화해서 다시 물품을 만들기까지 사람의 많은 손길이 필요하고, 긴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비용을 누군가가 부담해야 한다. 우리가 쉽게 “재활용하면 되는 거 아니야?”하고 쓰레기를 만들지만, 이렇게 많은 그 재활용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 재활용된 물품은 시장에서 가격경쟁력까지 가져야 소비될 테니, 지난한 일이다. 


우리는 쉽게 ‘누군가가’ 쓰레기를 재활용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내가’ 그 재활용을 하기는 어렵다. 쓰레기를 버리기는 쉽지만, 재활용하기는 참 어렵다. 


생각해보면, 아주 작은 일이라도 실천은 얼마나 어려운가.     

한 번은 회사에서 혼자 두유곽·우유곽을 모아 보겠다고 수거함을 비치해본 적이 있다. 두유곽·우유곽은 따로 씻어 말려 모아서 수거 업체에 가져다주면 자원이지만, 쓰레기통에 버리면 그저 일반쓰레기일 뿐이다. 그래서 씻고 말리고 모아서 수거 업체에 가져다주는 것은 내가 할 테니 따로 여기 버리기만 해달라고 수거함을 만들었지만...... 전혀 수거되지 않았다. 내가 열심히 안내하고 홍보하지 않아서일까? 하지만 결국 직원들에게 일일이 독려하기도 뭣하고 해서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그 다음부터는 그냥 내가 먹은 곽만 모아서 씻어서 모으는데, 한 번은 회사 탕비실에서 우유곽을 씻고 정리하고 있자니 그걸 보신 한 분이 재활용하느냐고 물어보시곤, “우리 집에 우유곽 많은데! 갖다 줄게요.” 하셨다. 그 다음부터 이따금씩 커다란 종이가방에 가득 모은 우유곽을 내게 주시곤 했다. 몇 번 그렇게 받아온 우유곽을 집에 가져가서 내가 모은 것들과 함께 제로웨이스트 샵에 갖다 주었다. 그 다음부터 그 분은 나를 볼 때마다 “아~집에 우유곽 많은데~ 갖다줘야 하는데~” 하신다.


나도 번거로워서 “동사무소에 갖다 주셔도 되고, 가까운 서울역 알맹상점에 갖다 주셔도 되요. 그리고 한 번에 너무 많이 주시면 제가 운반하기 힘들어요. 저는 차가 없거든요.”하고 말씀드리니, “아, 그건 번거롭고......”라고 하셨다.     


감당할 수 있는 번거로움과 불편함이란 어느 정도일까? 사실 그런 정확한 기준은 없을 것이다. ‘이 정도는 감당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와 개인적 동의가 존재할 뿐. 나는 <새가버치>에 참여하면서 집에서 티셔츠만 모아 보내면 된다는 것에 참 편리하다고 느꼈지만, 누군가는 티셔츠를 모아 그게 면 100%인지 일일이 확인하고 다른 소재 부분을 오려 내서 정리하는 게 참 번거롭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나도 하니까 누구라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직 우리 사회는 재활용이나 쓰레기 문제에 대해 ‘이 정도 불편함은 감당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개인적 동의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저, 불편함과 편함이 행동을 결정짓는 첫째 되는 이유가 아니면 더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 본다. 좀 더 우리들이 불편함을 수용할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업사이클링의 매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