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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휘 Apr 18. 2024

살아남기란 무엇일까?

생존에 대한 불안

회사에서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독서모임이래봤자 거창한 것은 없고, 분기별로 원하는 책을 한 권씩 사서 각자 왜 그 책을 샀는지 이야기하는 정도이다. 대부분 책을 신청할 시기에 인터넷 서점에서 최근 베스트셀러를 고르는 것 같다. ‘교보문고 들어가 보니까 요즘 이 책이 유명한 것 같더라고요~’하면서 고르셨다는 책들을 보니, 주로 이런 책들이다.     


‘지금은 AI시대니까 이러저러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지금 이런 변화가 시작되었으니 미래에는 00만 생존한다’     


지금 00하지 않으면 나는 생존할 수 없다, 도태된다는 내용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잘 팔린다. 책 뿐 아니라 어떤 컨텐츠를 봐도 그렇다. 불안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면서 재생산되고, 사람들은 그런 컨텐츠를 소비하며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생존에 대한 불안이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살아남기란 무엇일까?     

00하지 못해서 생존하지 못 한다면, 그것은 물론 물리적 죽음이 아니고 사회적 의미의 죽음이다. 알랭 드 보통이 <불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 해서’ 낙오되는 그런 것이다.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현재 사회의 사다리에서 너무 낮은 단을 차지하고 있거나 현재보다 낮은 단으로 떨어질 것 같다는 걱정. 이런 걱정은 매우 독성이 강해 생활의 광범위한 영역의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다.     


알랭 드 보통, <불안>     



 다시 말해, 사회적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 하고 사랑받지 못 하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과도 같다. 인간은 이다지도 사회적이다!     


특히나 한국 사회는 ‘정상성’에 대한 추구가 강하다. 어떤 ‘평균’ 안에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고, 게다가 요즘 말하는 ‘평균 올려치기’가 가세하면서 더욱 이 불안은 힘을 얻고 있는 듯하다. 정상적이고 평균에 들고자 하는 욕망은 강한데 평균의 기준은 점점 올라가고 있으니 그 욕망을 실현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저 불안이 과다해지면 생존했다는 것이 나의 자랑이 되기도 하고, 사회적 평균에-실제로는 올려치기된 평균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을 배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 배제 뒤에는, 기실 ‘평균(사회적 이상)에 도달하지 못 하는 나도 배제되어야 한다(또는 배제될 수 있다)’는 자기 미움과 불안이 있다.


요즘 사람들은 ‘공정’을 과도하게 추구하는데, 그 공정 추구는 사실 나의 성공을, 그 성공에 도달하기 위한 나의 노력을 인정해 달라는 처절한 목소리 같다. 사회에서 제시하는 이상에 부합했으니 나를 존중해 달라는 목소리. 달리 말하자면,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존중받지 못 할 것이라는 불안. 그래서 나처럼 성공하지 못했거나, 또는 나만큼 노력하지 않아 보이는데 나와 같은 성공을 거둔 사람들에게 ‘불공정’하다고 거대한 분노를 쏟아붓는다.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을, 생존을 그들이 빼앗아간다는 듯이.

내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죽음과 같기에, 생존이 절박할수록 미움과 불안은 거세진다.     


나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한국인으로 살아 이 사회의 가치를 충실히 답습하는데다 인정받으려고 정말 애써서 살고 있지만, 이 사회에 만연한 불안이 과다하다고 생각한다.     


저렇게까지 불안에 시달릴 필요가 있을까,

저렇게 “살아남기”가 대단한 가치인가

저렇게 안 해서 도태되면 정말 (사회적) 죽음이 있을까.

어쩌면 그건 거짓말이 아닐까?     


그러니까 사회에서 말하는 ‘00하지 못하면 생존하지 못한다!’고 했을 때, 정말로 ‘물리적 죽음’이 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제시한 이상에 부합하기 위해 애쓰는 것 외에도 내가 존중받을 수 있는 방법은 있지 않을까? 아니, 있어야 하지 않을까?

존중이라는 것이 아주 희소한 자원이어서 서로에게서 빼앗아야만 하는 자원은 아니지 않은가?

다양한 생존의 방식이 있어야, 저 거대한 불안,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타인에 대한(이면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물리적 죽음이 오기 전까지 사회적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전전긍긍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 내 생존을 자랑스러워하며 도태된 사람들을 멸시하고 싶지도 않다. 사회에 만연한 불안과 분노에 가끔 질식할 것 같은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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